볼셰나에서 나폴리로 가는 길, 잠깐 들른 카씨노
황홀한 어제의 밤이 끝나고, 숙취 없는 아름다운 아침이 밝아왔다. 이 하늘의 빛깔을 보고 그냥 앉아있을 수 없었다. 오늘은 렌즈가 두꺼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같은 코스를 밟기로 한다.
처음 달을 만났던 그곳에 다다르니 전구알만 바꿔 낀 것처럼 같은 위치에 다른 광원이 있었다. 낮 밤 모두 멋진 곳.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은 텅 빈 마을, 문을 여는 카페조차 없는 한적한 시간이었다. 말없이 아침 산책을 하다가 호숫가 바로 앞에 나와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노부부를 만났다. 눈이 살짝 마주친다. 씻지도 않은 채로 나온 나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그냥 지나가려는데, 앉아있던 아저씨가 나를 부른다.(이탈리아 사람들은 아마도 95%는 E형일 듯.) 대뜸 너무 아름답지 않으냐고, 묻는다. 나는 부인할 생각이 전혀 없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이 광경을 보고 어느 누가 그 질문에 부정하겠는가. 어느 나라에서 왔냐, 여행으로 왔냐, 어디를 여행하고 있냐 같은 기본 질문들을 주고받자, 대뜸 자기 집을 구경시켜 주겠단다. 바로 뒤에 있는 노란 집 문을 열어 보여주더니 자기들은 한평생 이 집에서 살아왔단다. 그리고 자기 아들은 로마에 있는 대학에 공부하러 유학(?) 보냈단다. 한국이라면 한평생 농촌에서 살아온 사람의 우리 아들 서울대 다녀요. 같은 멘트일까. 안물 안궁의 정보를 전해주는 아저씨를 보며 왠지 모를 정감이 느껴졌다. 한참 감탄을 주고받고, 여행 잘하라고 하시면서 가볼 만한 현지인 추천 장소를 알려주신다. 구글 맵에 꾹꾹 저장!
여행 이후 처음으로 햇반과 김, 한국에서 가져온 레토르트 반찬들을 깠다. 호화스러운 셀프 조식을 든든히 차려 먹고, 오늘은 카씨노(Cassino, 카지노 아님 주의)로 떠난다. 여행의 우선순위는 운전하며 이동하기 편한 루트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카씨노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천천히 슬로우하게 움직이기 좋은 도시로 1박을 정한 것이었다. 볼세냐 호수 근처 마을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루트로 250km 정도를 이동한다. 달릴수록 이렇게 고지대에 마을이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깊이깊이 높이높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마을 오자마자 풍경이 심상치가 않다. 숙소에서 내다보니 저 멀리 큰 산이 보이고 숙소 뒤쪽으로도 높은 산에 수도원까지 있다. 길거리로 나가보니 알록달록 귀여운 파스텔톤의 건물과 깔끔한 거리의 모습이 뭔가 지금까지 거쳐왔던 곳들과 느낌이 다르다. 조금 찾아보니 카씨노는 FIAT 본사와 자동차 공장이 있는 도시이고 대학교도 있는 도시라고 한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날씨가 점점 더워져서, 한국의 10월 초라면 상상할 수 없는 온도를 매일매일 경험하고 있다. 긴팔을 겹쳐 입었다가도 햇빛이 높이 떠오르면 반팔이나 나시를 입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이다. 덕분에 몸을 가볍게 하고 도시를 구경할 수 있어서, 시원한 음료를 몸 시리지 않게 맘껏 마실 수 있어서 좋기도 하다. 지금껏 여행을 할 때면 이상하게 비를 많이 만나고, 또 빗기운 속에 으슬으슬 감기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늘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정말 여기는 태양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해야 마땅하다.
큰 도시는 아니지만, 왠지 모를 아는 도시의 향기가 나는 이곳 카씨노. 이전 도시들은 내가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는 것이 즐거움이었다면, 이곳은 일상의 사람들 속에 섞여 낯설지 않은 행동들을 하는, 익숙함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혹여나 벌벌 떨까 추울까 한국에서 든든하게 챙겨 온 무거운 옷가지를 내려놓고, 이 온도에 맞는 간단한 옷가지 쇼핑도 하고, 커피와 빵도 먹고, 관광객이 아닌 사람들 구경도 하고, 목적 없는 산책도 해 본다. 좋은 날씨에 혼자 도시를 헤매는 느낌은 나쁘지 않지.
개인적으로는 도시의 사람들을 알려면 카페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패션을 보면 된다는 기준을 삼고 있는 편이다. 아침에 간단히 요기하려고 카페를 찾을 때에도, 구글 평점을 알아보는 한편, 직접 가서 카페에 들르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 카페의 주된 고객은 청장년층의 남자들이었는데 셔츠와 재킷, 타이까지 갖춰 입은 남자분들이 많다는 게 눈에 띄었다. 왜인지 길에 젊은 10대, 20대들도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었는데, 숙소 근처에 카씨노 대학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나중에 배경을 알고 나니 도시의 생기 있는 분위기, 도시의 색깔을 만드는 건 그 도시의 사람들이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길 위에서 귀여운 피아트 자동차들의 유니크한 컬러도 발견하곤 했다.)
이곳에 와서 가장 감동스러웠던 순간은 스시를 먹을 수 있었던 저녁이라고 할 수 있다. 여행의 반 정도가 지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생선의 날 것을 먹을 수 있다니. 예쁘게 샛노란 건물의 스시집 료. 아마도 중국 이민자 혹은 중국계 이탈리안이 운영하는 일식당 같은데, 놀랍게도 15유로 정도만 내면 무한 리필로 거의 모든 메뉴를 무제한 주문할 수 있다. 사시미, 스시, 마끼, 샐러드 등 대충 한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일식 메뉴는 거의 다 주문할 수 있는데, 화룡점정은 미소 된장국이었다!! 컵라면이 아닌, 따듯한 간이 된 국물 메뉴를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평소 대식가가 아니지만, 이 날만큼은 배가 볼록하게 터져올 때까지 원 없이 밥과 날 생선을 먹었다. 내 위장이 좀 더 컸더라면 하면서 아쉬웠던 저녁은 10대 이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행복한 얼굴로 식사를 계산하고 나오는데, 포춘 쿠키를 받았다.
"No tiene que preocuparse por el futuro."
(You don't have to worry about the future.)
뻔하게도, 지구 반대편에 현실을 두고 온 나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필요했나 보다. 이 날 저녁은 배불리 먹여주시는 양식과 함께 신의 음성과 같은 위로를 받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