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디 UnD Jan 01. 2024

#9. 나폴리, 그 무질서와 둔탁함 속 아름다움

미항의 이면에는 깡패들이 있다

카씨노에서 나폴리까지는 1시간 조금 넘는 정도의 거리. 오늘은 운전 시간에 대한 큰 부담없이 나폴리로 향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생각은 나폴리 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바뀌기 시작한다. 운전 경로는 아주 편안한 편이었지만, 나폴리 근방으로 오자마자 차가 눈에 띄게 많아진다는 느낌이 들더니 급기야는 길이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호가 걸려 잠깐 서 있자니 까무잡잡한 피부와 머리의 집시 같은 여자가 다가와 무턱대고 청소해준다며 거품 솔을 앞 유리창에 문질러댄다. 으악. 난 동전도 없는데. 의사 표현을 위해 필요없다고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고, 손바닥을 펼쳐 저지하는 제스처를 해보기도 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나는 애써 눈을 피하며 빨리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기만을 기다린다. 거부하는 반응 이후에 무반응으로 바뀌자, 이내 포기한듯 다른 차로 옮겨간다. 휴우.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땀이 바짝바짝 났다. 생각해보니, 집시족들을 이런 저런 나라에서 많이 만나긴 했어도, 유리창 강제 청소부들은 처음 만난 게 지금까지 유럽에서 운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들이 많구나, 놀라면서도 겸손해진다.

나폴리 시내로 들어서면서 충격에 빠진 운전자 시점

번화가 쪽으로 들어오니 도로 상황은 더욱 재밌어진다. 차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나폴리의 자동차 운전자들, 원래도 무법의 세계 속에 존재하지만 더욱더 아무때나 치고 빠지는 오토바이 운전자들, 이쪽에서 빵빵, 저쪽에서 빵빵, 클락션은 이리저리 인삿말처럼 오간다. 그 중심에서 나는 긴장을 놓을 틈이 없다. 빨리 숙소에 도착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미리 숙소 호스트와 이야기 해둔 유료 주차장으로 곧장 향한다. 구글 맵 리뷰를 조금 보니, 주차장 관리자들이 불친절하고 막무가내이기로 악명 높은 곳이라는데, 호스트 분께 물어보니 출차 시간만 잘 지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며 걱정말란다. 이틀 머무는 동안 48시간에 60유로, 9만원에 가까운 주차비를 내면서도 다른 수가 없다. 나폴리에서 주차장까지 딸린 숙소를 잡는 건 정말 하늘에 별따기 이거나, 별을 살 수 있는 돈(?!)을 내야 하는 것 같다. 한 동안 시골에서 머물다가 또 다시 대도시로 들어온 게 실감이 난다. 피렌체 만큼이나 수많은 관광객들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한다.


운전과 주차 문제로 너무 긴장을 한 탓일까, 급하게 배가 고파져 숙소에 짐만 두고 밥을 먹기로 했다. 주차장 아저씨에게 여기서 유명한 피자집이 어디냐 하니 시큰둥한 표정으로 길 바로 건너편 간판을 가리킨다. 이 동네 사람들한텐 피자가 너무 별 거 아닌건가? 큰 고민도, 진지한 답변도 필요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살짝 머리를 갸우뚱거리긴 했지만 멀리서 헤매는 거보다는 빨리 내 안의 거지를 잠재우는 게 낫겠다 싶어 긍정적으로 회로를 돌려본다.


나폴리는 피자로 유명하다. 나폴리 피자는 얇고 쫀득한 도우를 화덕에 구워 위에 토마토 소스와 치즈를 올린 스타일이 대표적인데, 시간이 지나면 축축해져 박스에 눌러붙을 정도이니 테이크아웃 보다는 직접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게 좋다. (물론, 나는 테이크아웃 해온 것도 아주 맛있게 몇 끼에 걸쳐 잘 나눠 먹은 사람이지만.)

부팔라 치즈를 얹은 마리게리따 피자,  굵은 칠리 가루가 피자 한 판 먹기에는 필수!

10유로가 넘는 피자를 시켰다.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피자 최소 단위. 젊은 여자도, 나이 든 아저씨도, 유럽에서는 모두 피자를 한 판으로 시켜 먹는다. 레스토랑에서 한판 이하로 메뉴를 팔지 않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에 유럽의 사람들이 위장이 엄청나게 큰가보다 라고 생각했었다. 피자는 따끈하고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나왔다. 누구나 다 아는 그 맛인데, 쭈욱 늘어지는 모짜렐라 치즈를 상상한 나에게 생각보다 치즈의 식감은 단단한 편이어서 의외였다. 위장이 소심한 나 같은 사람도 페퍼가 들어간 올리브유(고추 기름처럼 빨갛다)와 crushed chilli를 곁들여 먹으면 한 판까지는 아니지만, 몇 조각치는 더 먹을 수 있다.

해가 어스름하게 져 오는 나폴리의 번화가를 걷는다. 도시마다 색깔이 고유하고 독특한 이탈리아이지만, 나폴리의 존재감은 유달리 묵직하고 명확하다. 산책을 하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냄새, 머리 스타일, 얼굴 표정, 패션에서 이 곳의 시간과 공간을 느껴본다. 항구 도시답게 묘하게 들뜬 분위기와 밤이 더 잘 어울리는 다크함, 가로등 없는 뒷골목의 암흑까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감각의 즐거움들이 펼쳐져 있다. 나하나 정도 낯선 여행자가 발을 디뎌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예전부터 이런 곳,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럴 곳일 듯한 느낌의 기묘한 안정감이 있다.

우연히 카메라에 담긴 사람들의 시선과 얼굴을 좋아한다

다음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부시시하게 아침 산책을 해본다. 아침 장이 섰는지 천막을 치고 과일, 채소 등을 파는 상인들이 눈에 보였다. 여행 중 시장 구경은 타율이 좋은 편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잡학 사전을 채우기에 아주 좋은 기회이기 때문. '총각들의 채소가게' 같은 컨셉의 한 가게에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물건을 많이 사기에, 나도 감을 조금 사보려 수줍게 줄을 섰다. 드디어 돌아온 내 차례. 나 혼자 여행 중이라 조금만 사고 싶다고 했더니, 그냥 가져가라며 손에 쥐어준다. 민망함에 눈에 휘둥그레해진다. ('역시 너무 조금 골랐나?', '아, 이러려던게 아닌데,' 부채감에 취약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별 것 아니라는듯 웃어보이는, 턱수염이 난 성실한 얼굴의 청년 사장님. 내가 전달 할 수 있는 건 오늘도 "그라찌에!" 밖에 없구나. 훈훈해진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와 깎아먹어보니, 달게 잘 익은 가을 감이었다. 오랫동안 그 사장님의 미소가 마음에 남았다.

이제 푸니쿨라를 타고 성벽 전망대를 가보기로 한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일종의 관광지이지만, 꽤 괜찮다는 후기가 많았다. 나무와 산과 도로로 점철된 지난 며칠간의 나는 푸른 풍경에 목이 말라 있었다. 이 성벽에 올라오면 비로소 나폴리가 베수비오 화산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차와 행인들로 복작복작한 도로를 벗어나 높이 올라올 수록 모든 것이 넓고 선명해진다. 건물만 가득한 줄 알았던 나폴리는 드넓은 바다를 끼고 있었다.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만 달라져도 볼 수 있는 세계가 달라진다. 성벽을 오를 때는 그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꿋꿋이 발을 내딛기만 했는데, 그 끝에서 기대 이상의 파아란 풍경을 보니 눈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사람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다.

환한 빛이 공평하게 온 세상에 고루 비치는 그 때, 성벽 가장 높은 곳 산란된 빛 속에서 꿈처럼 드리워진 나폴리만과 카프리섬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앞으로 남은 여정 동안 다다르게 될 어느 지점이 저 먼 바다 가까이에 있으려나 하며 굽어본다. 아무 경계도 없고, 끝도 없을 것 같은 그 바다에 마음이 오랫동안 잠겼다. 곧 만나게 될 파랑색을 미리 만난 기분이었다. 천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풍경과 동화되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이고, 때 묻은, 자연과는 이미 멀어진 존재여서일까.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는 이런 풍경에서는 나 자신을 사진으로 담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확인 도장을 찍듯 나와 같은 입장에 선 누군가에게 부탁해 인증샷을 남겼다. 다 사그러지더라도 이 순간에 서있었다는 그 사실만은 잊고 싶지 않아서. 나만이 꺼내볼 그 사진 앨범의 한 장이 될 순간을 디지털 기기에 애써 저장한다. 그 옛날 언제일지 모르는 그 때, 이 성벽에 둘러쌓여 나와 같이 저 먼 바다를 바라봤을 누군가와 접촉을 시도하며 말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풍경이었다. 눈동자 속에 푸르름을 가득 안고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왔다. 도시는 언제그랬냐는듯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발그레하게 져물어가는 나폴리의 골목
저녁도 피자. 이번엔 사치를 좀 더 부려 파스타와 문어샐러드까지!

하늘은 핑크빛으로 물들어오고, 배는 다시 적당히 고파졌다. 밥 먹을 시간이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앉아서 먹는 경우 자릿세를 3유로-5유로 정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은 테이크아웃을 하기로 했다. 바다 근처로 갈 수록 해산물이 점점 맛있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큰 맘 먹고 메뉴를 세 개나 주문했다. 이 정도면 어릴 때 꿈꾸던 '부자' 축에 속하는 사람 같아지는 느낌이다. 혼자서 괜히 우쭐거려 본다. 후기를 남겨보자면, 루콜라와 햄이 들어간 피자는 맛이 없기 어렵고, 문어 샐러드는 크로아티아에서 먹었던,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문어 요리만큼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신선한 재료 맛이었다. 의외로, 해산물 파스타의 구성품인 바지락 조개는 정말 야들야들하니 맛있었다. 따로 주문해서 먹고 싶을 정도로! 파스타 소스가 레스토랑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고소하고 간이 잘 된 해산물 베이스의 소스였다. 한국에서 먹는 파스타만큼 크림이 들어간 짙은 맛은 아니지만, 올리브유와 마늘 구성보다는 좀 더 간간하고 진한 색감의 소스. 파스타도 사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역시 남이 해주는 파스타가 젤로 맛있다고 생각이 든다.


기부한 긴 옷들과 감사의 의미가 담긴 마스크팩

이틀을 묵고 나폴리를 떠나는 날, 점점 날씨가 무덥고 짐가방도 무거워지는 탓에 나시 원피스를 사고 몇 가지 옷가지를 숙소에 버리기로 했다. 숙소 호스트에게 허락을 구하려 메시지를 했더니, 괜찮다고 하면서 두고 가면 노숙자들에게 옷을 기부해주겠단다. 마침 숙소에 있는 세탁기로 깨끗하게 세탁하고 말려둔 상태라, 오히려 다행스럽고 반가웠다. 세심하게 모든 게 괜찮은지 물어봐주고 신경써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아 마스크팩도 함께 두고 숙소를 떠난다.


유료 주차장 아저씨들에게 행패 당하지 않으려고 출차시간에 정확히 맞추어 짐을 들고 나왔다. 주차장 입지가 나쁘지 않은지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이 많았다. 차를 빼는 동안 잠깐 짐을 두고 기다리려는데, 이미 내 차는 차고에서 나와 바깥쪽 이면 도로 쪽에 주차가 되어있다고 한 아저씨가 짐을 손수 끌어 안내를 해주겠단다. 별 의심없이 아저씨를 따라가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실었는데, 싣자마자 아저씨는 나에게 당당하게 "팁"을 외친다. 표정관리가 안되는 나, 아니 이렇게 눈뜨고 코를 베어가려고 한다고?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현금이 없다고 내가 가방 들어달라고 한 게 아니라고 항변을 해본다. 아저씨는 어이없다는 듯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홱하고 가버린다. 도로 바로 위에 주차가 되어있어 후진으로 차 빼는 걸 봐주는둥 마는둥 하더니, 그거 하나 못 빼냐는 표정으로 소리를 내지른다. 나참!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심정으로, 돈을 뜯기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에 안도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엑셀을 밟는다. 이 때만 해도 내가 다시 나폴리에 들러 이 주차장에 주차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말이다.

나폴리를 떠나 향하는 다음 여정지는 살레르노 지방. 이탈리아 여행의 백미, 남부 해안 도시들을 거쳐 파랑을 충전할 일주일 가량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이전 11화 #8. 카씨노, 피아트의 도시를 거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