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기 좋은 도시 골든 티볼리
티볼리라는 이름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티볼리이기 때문. 그래서인지 지도에서 로마 근방 오른쪽 부근에서 이 이름을 발견했을때 더 정감있고, 다른 도시들보다 더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아마도 쌍용 자동차 마케터 중 한 명이 휴가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와서 영감을 받은 거겠지? (여담으로, 이탈리아에는 Meta라는 도시도 있다.)
만약 내 상상이 사실이라고 하면, 대체 이 도시의 어떤 점에서 자동차 이름으로까지 티볼리를 붙이려 했을까 점점 더 궁금증이 증폭되는 것이다. 어차피 로마를 여행할 생각은 없었기에 공항에서 적당히 멀지 않은 위치에서 한 도시를 더 일정에 넣기에는 딱 좋은 곳이 티볼리였다. 그래 기왕 계획한 거, 가서 티볼리 기념품이나 몇개 사와야겠다 하며 혼자서 신나했다.
티볼리는 로마에서 차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수도 근교 도시다. 워낙 크지 않은 도시라 걸어서 1시간 이내 도보로 번화가 안은 다다를 수 있는 것 같은 느낌. 도시에 들어와 시선을 돌리면 전반적인 색깔이 다시 브라운에 가까워져있다. 이 몸집 작은 동네도 만만찮게 오래된 마을이라는 느낌이 확 온다. 이런 동네는 역시 운전과 주차가 만만치 않은데, 목숨을 건 비보호 좌회전을 한 끝에 네비가 안내하는 얍다라한 골목으로 겨우 들어왔다. 숙소는 길다란 골목 안쪽 끝에 위치해있었는데 다행히 주차가 수월했다.
캐리어 바퀴가 턱턱 거리는 잔디밭이 깔린 앞마당을 지나 앤티크한 느낌의 주택으로 들어선다. 이런 숙소는 놀라움을 자아내는 동시에 공포감을 주기도 하는데, 보통 엘리베이터가 없고 길고 높은 계단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리라.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당황하지 않고 깔끔하게 그루밍한 숙소 호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호스트 아저씨 Andrea는 삼형제가 함께 이 숙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돌아가면서 상주하고 건물을 관리하는데, 우아한 애티튜드가 꽤나 건물주의 느낌이 났다. 여행 막바지의 내 캐리어도 꽤나 무거운 상태였지만, 그는 품위를 잃지않고 방까지 캐리어를 옮겨다 주었다. (그라치에! 디스크로 고장난 내 허리가 죄송합니다..)
방은 중세시대 느낌이 나는 나무로 된 창틀과 따스한 느낌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침대 위에는 수건과 함께 조화 꽃도 얹어져 있다. 별것 아니지만, 환대받는 느낌에 기분이 나쁘지 않다. 깨끗한 숙소 상태와 욕조가 있는 화장실이 맘에 들었다. 오늘 저녁엔 몸을 좀 뎁혀봐야지 하며 속으로 기대감을 키웠다.
이 숙소는 티볼리의 old town이 내려다보이는 old house였다. 마당 뒤쪽으로 올리브 나무가 심겨있었는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이런 나무들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아서 호스트에게 물었더니 최소한 800년은 된 나무란다. 믿거나 말거나식의 이야기지만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해주는 탓에 사회적인 모습으로 "와!" 라고 감탄사를 터뜨려주었다. 한 가지 내가 믿는 건 나무는 사람보다 더 오래살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역사를 옆에서 조용히 모두 지켜보고 있다는 것.
거리를 산책하며 만난 지평선과 집의 따듯한 색감들. 사진으로는 그 총체적인 경험이 잘 담기지 않아 아쉽다. 그 어느 한 집도 같은 색깔 같은 모양의 집이 없는 이탈리아의 마을들. 획일화된 기준을 제시하면서 한 가지의 절대적인 옳고 그름만을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매력을 존중해주는 이탈리아 문화와 닮아 있다.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균일하게 유지되지 않고, 계속해서 각 부분들이 변화하는 것이 유기체의 특징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균형과 조화라는 개념에 대해서 각자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원리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탈리아는 살아 생동하는 곳이라서,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고,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곳이다. 두 번이나 긴 여정으로 이 나라 여행을 왔고, 제법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많은, 그래서 더 알고 싶은 나라임에 틀림없다.
내가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박스 같은 모양의 회사 건물 속 어느 의자에 앉아서 보내는 직장인으로서, 내 시간과 돈을 거래하는 거래자로서, 내 하루의 1/3은 시간의 흐름을 내 자유대로 관리할 수 없는게 나의 현실이다.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그 하나 하나를 맛보고 누린다는 건, 그제서야 나의 시간의 주도권을 되찾는 일이다. 뭔가에 몰두하지 않아도 충만한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것들 중 가장 쉬운 방법이 산책 같다. 대부분의 나의 여행 에세이의 내용이 어디에서 뭘 보고, 뭘 먹었는지, 그때 뭘 생각했는지 등에 대한 것이지만, 사실 물리적으로 보면 여행에서 가장 많은 시간은 "걷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겠다. 그렇게 오후 내내 나는 이탈리아를 '산책'했다.
빛이 아름답게 드리우는 장면들을 보면 현실에 있어도 꿈을 꾸는 것 같이 아득해진다. 영화 속에서 봤던 어떤 장면 같기도 하지만, 유일하게 처음 다가오는 순간처럼 이 현실이 선명해지기도 한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 하는데, 아름다운 빛을 목격하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드는 이유도 빛의 속성이 주는 감각적 충동이 있기 때문 아닐까. 나는 그 티볼리에서도 빛의 마법에 오래도록 매혹되어 있었다.
길을 걸으며 TIVOLI가 새겨진 기념품도 사고(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오후를 만끽했다. 사실 티볼리에는 오래된 역사 유적지 같은 느낌의 관광지가 몇 군데 있다. (아마도 최소 중세시대쯤에 만들었을) 오래된 궁전 정원, (또 그 훨씬 이전 언제일지 모르는 시기에 만들어진)신전 형태의 건물 같은 것들인데, 아무래도 개인적인 관심사가 오래된 물건이나 건축물은 아닌지라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쩌면 내 기준에서는 약간 헛탕친 목적지들인데, 독특함에 디테일한 배경설명이 없는 경우이거나, 사진 몇 번이면 음미할 접점이 없는 장소들이다. 하지만 그런 장소들이 관광지라는 라벨을 달고 구글 맵에서 flagging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보기도 한다. 여행에서의 만족이란 철저히 주관적인 영역이라, 전혀 반대의 케이스더 많을 것이라 생각하고 존중한다.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해야하기에 필요한 내용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오래간 함께한 렌트카 반납, 공항으로 이동, 체크인 시간 확인 등 폰을 들여다보고 찾아보고 있는데, 아뿔싸! 렌트카 반납이 로마 시내 한 중간으로 되어 있는 것 아닌가?
뻔한 실수를 한 과거의 내 자신이 어이없고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웃프기도 했던 게, 두 군데의 이름이 너무나 비슷한 스펠링이었다(?)
오해한 지점명: Rome Flaminia
옳은 지점명: Rome Fiumicino
(혹시 별로 안 비슷한가요..?)
하여간 어쩌나 어쩌나 하면서 발을 동동구르는 지금 시간은 저녁 7시. 전화를 비롯한 모든 공식적인 업무 시간이 종료되었을 때다. 하아.. 어지간한 돌발 상황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지만, 머릿 속이 하얘져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로마 시내까지 들어갔다가 이 돌덩이 같은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이동할 생각을 하니 고생이 훤하다. 다시 뇌를 부여잡고 T 모드로 스스로를 컨설팅한다.
‘어차피 지금 머리 싸매봤자 해결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내일 아침에 방법을 찾아보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릴렉싱 타임을 위해 커다란 욕조에 물을 받아보기로 했다. 욕조 레버를 힘차게 돌리는데, 물이 나오지 않고 갑자기 바닥 쪽에서 스멀스멀 근원을 모를 물이 새나왔다. 아 이건 또 뭐지 싶은데, 금방 해결이 될 줄 알고 호스트를 불렀다. 호스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이곳 저곳을 살펴보더니, 해결 할 수 없음을 내게 통보했다. 오래된 집이기 때문에 고장이 쉽게 날 수 있단다. 큰 수건으로 바닥의 새어나온 물을 막아주고 그는 떠났다.
..
...
....? !
그래, 포기하면 편하다. 그깟 몸 좀 안 담근다고 별 일 안난다. 그리고 오히려 좋지 아니한가. 이김에 내일 호스트에게 렌트카 리턴 장소 이슈로 도움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새 아침이 밝아왔다. 조식은 호스트가 직접 소담하게 차린 몇 가지의 음식과 과일, 커피가 제공되었다. 장성한 일반인(?) 남자가 내가 먹을 음식을 차려주는 건 왠지모르게 낯설다. 능숙하게 주방의 일을 하는 건 왠지 여자 쪽이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나는 스테레오타입에서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인간인가보다. 당연하고도 약간은 황송한 밥을 먹으며, 나는 속으로는 맹수처럼 이 과업을 부탁할 타이밍을 노린다.
“저기.. 제가 지금 좀 문제가 있는데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무슨 문제에요?“
“ 아.. 사실은 제가 이렇고 저렇게 되서.. 이런 소통을 해야되는 상황인데 아무래도 이탈리아어로 설명하는게 훨씬 좋을 것 같아서요.”
“오케이! 아직 시간이 이르니 콜센터에 좀 있다 전화해볼게요.”
억겁 같은 30분이 흐르고, 밖에서 전화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심지어 호스트는 유선전화를 사용했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지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대화가 길지 않게 끝나고, 호스트가 나를 부른다. 자부심 넘치는 기쁜 얼굴로, 모든 게 해결됐단다!
“우와!!! 너무 감사해요.
정말 저에겐 너무 큰 도움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라찌에!“
이 일을 통해 깨달은 건, 새삼 이탈리아 사람들이 꽤나 친절한 오지랖이 있다는 것! 그리고 언어가 별건 아니고 필요한만큼 외국어를 배워 활용할 수 있지만.. 더 좋은건 그 언어를 하는 사람들을 통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돌아갈 길을 직선 코스로 다다른 이 쾌감!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고, 조심히 돌아갈 일만 남았다.
여행의 끝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마지막으로 티볼리를 기억하기 위해 아침 산책을 했다. 체크아웃 직전까지도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나는 거리 위에 있었다.
오전 10시 반. 나는 로마 공항을 향해 시동을 걸었다.
-다음은 이 연재 브런치북의 마지막 편 이탈리아 여행 Outro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 제 글을 함께 해주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