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리 섬을 짝사랑하다
여행이 딱 3일 남았다. 여행의 끝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슬퍼진다. 포지타노를 떠나 마사 루브렌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지역으로 이동을 한다. 살레르노 지방부터해서 여기까지는 이탈리아 전체 지도로 보면 앞쪽 발목 시작점 정도에 위치한 해안이다. 사실 이곳을 여행지로 정한 것은 별다른 목적은 없었고, 무척이나 컨디션이 좋은 숙소를 발견한 것(+가성비) 그리고 원 없이 바다를 볼 생각뿐이었다.
다른 선택지들도 열려 있긴 했었다.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 때문에 소렌토가 좀 더 유명한 느낌이긴 하지만, 생각보다 소렌토에서 할 일이 없는 것 같았고, 동선상 너무 많이 산을 뚫고 올라가는 길은 여행 막바지에 힘들 것 같아 피했다. 이동하면서 보니 슬슬 관광지보다는 동네 사람들이 사는 진짜 마을 같은 느낌으로, 식당이나 가게들도 꽤 띄엄띄엄 있기 시작한다. 이틀 동안 하루는 에어비앤비 느낌의 숙소, 하루는 고급 호텔 느낌의 숙소에 예약을 해두었다. 내 나름의 여행 계획 방식인데, 여행 초반에는 조금 힘들더라도 가격과 동선 중심의 숙소,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 더 비용이 들더라도 고급 숙소에 머무는 패턴으로 예약을 한다. 여행의 끝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아무래도 막바지에 몸이 피곤하기 때문에 조금 더 편안한 게 여독을 줄이는 데 도움도 된다.
브레이크타임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왔다. 주차장도 널찍하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한산한 느낌이었다. 주 고객층은 이 주변 로컬 피플들인 듯했다. 메뉴판을 들고 온 남자 직원도 동양인 여자애 한 명이 갑자기 들어오는 일이 흔치는 않은 듯 살짝 긴장된 상태로 주문을 받았다. 상대방이 긴장을 하니 나도 괜히 긴장이 된다.
메뉴를 조사하고 간 게 아니라서 한참을 메뉴 연구를 했다. 토마토, 가지가 들어갔는데 맛이 없을 수 없겠지 하며 하나 시키고, 뇨끼는 현지에서 꼭 먹어보고 싶었던 거라 또 주문해 봤다. 음식은 이탈리아답지 않게 신속하게 나왔고, 양도 푸짐했다. 따끈따끈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볶음 요리부터 한 입 먹어보는데, 이게 웬걸! 크게 맛을 기대하지 않고 방문한 곳인데, 지금껏 내가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몸이 뎁혀지는, 가정식 느낌의 요리였다. 누가 이런 요리를 한 걸까 하고 주방 쪽을 바라보니 그제야 나이 지긋하신 남자 쉐프께서 위생모자를 쓰고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인다. 아주 일상적인 손놀림으로 노련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니, 맛이 없을 수 없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음 놓고 와구와구 먹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거리며 몸을 비비며 다가온다. 줄 게 없어 미안하다며 달래 보는데,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존재를 알리는 고양이. 혹시나 해서 조금 나누어주니 맛있게 냠냠 잘 먹어댄다. 몇 번을 그렇게 주다가 아무래도 고양이 위장엔 사람 요리가 안 좋을 것 같아 모른척하고 먹는데, 이 녀석. 다른 테이블에 가서도 똑같이 애교 작전을 시전하면서 먹을 걸 얻어먹고 있는 것이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보였다. 그래, 너도 먹고살 궁리가 있어야겠지 하며 웃어본다.
배불러 먹고는 숙소 주변을 탐방해 본다. 아그리뚜리스모가 있던 지역처럼 완전한 농촌은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이 꽤 모여 사는 동네 같은 느낌의 이곳. 길가에는 무화가 나무가 꽤 밀도 있게 심겨 있다. 무화과 나무를 실제로 처음 보기도 했고, 무화가가 달려있는 모습도 처음 봐서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넓적한 이파리 사이사이에 밤처럼 달려있는 자줏빛의 열매. 아직 익어가는 중인 연둣빛도 있었지만, 몇 개는 잘 익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철저히 내 위주의 생각일 수 있다.) 줄기가 마구 엉켜있는 모습이 관리를 하는 나무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충동적으로 무화과 두 알을 땄다. 생각보다 무른 줄기 끝 부분은 손으로도 쉽게 분리가 되었다. 과연 내가 아는 그 무화과 맛일까 너무 궁금해하며 휴지에 소중히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남은 하루, 어딜 가서 무얼 하면 좋을지 숙소 호스트에게 물어봤다. 보통 이 지역에서는 하이킹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추천을 해주었지만, 나는 딥하게 하이킹을 할 만한 복장도 준비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몸이 많이 지쳐있는 상태여서 에너지를 과소비하는 액티비티는 하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그러면 근처 멀지 않은 산에 있는 뷰포인트를 가보란다. 카프리 섬이 아주 잘 보여서 비경이란다. 그렇게 나는 수동적으로 목적지를 부여받은 여행자가 되었다. 뭐든지 세세하게 계획하고, 하나하나 퍼즐 조각 끼워 맞추듯 하는 여행을 즐겼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추천의 말 한마디, 우연히 찾은 장소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찾아 나서는 세렌디피티의 여행자가 되어간다. 나이가 들면서,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 져서일까, 이것도 나름 편하고 재미가 있다.
사진에 보이는 가게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테이크아웃하고, 에스프레소 한 샷을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에스프레소를 내올까 궁금했는데, 네스프레소가 아닌 전혀 처음 보는 캡슐커피 머신이 있었다. 거기다가 전혀 다르게 생긴 캡슐을 넣더니, 금새 커피가 나왔는데.. 더 놀란 건 그 맛이 그냥 시골 가게 커피 머신에서 나온 맛이 아니라는 것. 대체 이탈리아란 어떤 나라일까, 이 나라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그냥 커피에 진심인 나라 같다. 샌드위치 패키지도 너무 귀여운 카툰 느낌의 은박지였는데, 하나도 촌스럽지 않고 너무 세련되어서 놀랐다. 그러고 보면 가게 외관들도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냥 꾸미지 않고 건물의 색깔이랑 참 잘 어울리게 포인트 컬러를 뽑아놓는다. 고풍스러움과 모던함 이런 스펙트럼 위에 있지 않은 '이탈리아스러움'이라는 개성이 부럽다.
이런저런 구경도 하고 조금 헤매고 어쩌고 하다 보니, 차 앞쪽 유리창 저 멀리서 해가 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아직 도착지에 다다르려면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는데,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잠깐 고민하다가 급하게 차를 세웠다. 아차! 산 뒤쪽에 해가 살짝 가려지면서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걸 보니, 그냥 내리지 말고 그대로 달렸어야 했나 보다. 뒤늦게 차에 다시 올라타 꾸부렁길을 지나 원래 목적지인 야트막한 산 정상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이 조용한 마을에, 해 지는 시간이 되니 자동차가 한 두대, 세대씩 그 근처로 모이고 있었다. 정확한 스팟은 알지 못한 채 아무 데나 차를 세웠다.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이끌려갔다. 울타리를 지나 언덕 너머 수풀 덤불 쪽으로 걸어가니 하늘 위의 풍경 같은 장관이 펼쳐져다. 저기 멀리서 해는 쪼그맣게 내려가고 있었고, 카프리 섬은 구름 위에 떠있는 섬처럼 둥둥거렸다. 조금만 높이 올라왔을 뿐인데, 바람이 세게 불고 안개까지 살짝 낀 장면이 갑자기 다른 세계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아, 이게 이쪽 바다의 끝이구나. 그리고 저 섬이 이곳을 지키고 있구나. 정말로 이탈리아의 여행의 끝에 성큼 다가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의 해는 동그라미에서 직선으로 납작해지더니 유난히도 짧게,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지역에서 마지막 하루를 보낼 숙소에 도착했다. 조금 더 바다 끝 쪽으로 붙은 곳의 숙소인데, 지금까지 묵었던 곳과는 다르게 호텔식으로 운영되는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일찍 도착했지만, 방이 준비되어 있어서 럭키하게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통창에 가까운 큰 창문, 그리고 그 프레임 사이로 가득 들어찬 경계선 없는 파랑파랑한 바다와 하늘이 바로 보였다. 여행에서 처음으로 호캉스 하는 기분인데 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호텔 주변으로는 사실 거의 아무런 시설들이 없는 외딴곳이라, 숙소 안에서 조식 같은 간단한 식사부터 미쉐린 코스 요리까지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릴렉싱 타임을 보낼 수 있도록 야외 풀도 열려 있었다. 외딴 것 좋아하는 나에겐 안성맞춤! 호사스러울 정도였다.
해가 있을 때 몸 좀 담가보자며 간 수영장에는 이미 단체 여행을 온 미국인 여행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썬베드에 누워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수영도 하면서 하하 호호 깔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나 빼고 다 친한(?!) 분위기에서 혼자 이방인이 되어 노는 걸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어차피 내 돈 내고 온 이곳! 얼마 안 남은 시간까지 박박 긁어 충분히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에 몸을 담갔다. 앗차차.. 근데 물이 너무너무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치약! 하며 추운 소리를 냈더니,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물 차갑다고 걱정을 해주신다. 나도 모르게 수줍고 머쓱한 인정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물장구도 치고 조금 놀다가 햇빛으로 나오니 이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차갑고 축축한 몸 위에 내리쬐는 지중해의 햇빛. (크..) 온몸이 까무잡잡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때까지 나는 햇빛 아래에 주저 없이 앉아있었다. 사실 숙소에서 추가 금액을 지불하면서 뭔가를 더 하는 것도 굳이 선택하지 않는 편인데, 이 날은 그냥 디저트 하나라도 먹고 싶은 마음에 쿨하게 레몬 타르트를 주문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질 않길래 의아한 마음이었는데, 시간 들인 만큼 너무 예쁘게 데코레이팅되어 나온 타르트는 정말 맛있었다.
할 일 없는 백수마냥 느릿느릿하게 오후의 해는 낮아져가고 있었다. 나른해진 기분으로 야외 테라스에 앉았다. 여기에 그냥 앉아있을 수는 없고 운영되는 바에서 음료를 주문해야 한단다. 그래, 뭐 어떠랴. 이 풍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마시든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큰 고민은 없었다. 음료수에 따라 나오는 간식거리만 먹어도 저녁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 빛으로 가득 찬 풍경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렸다. 카프리 섬의 아침, 낮, 오후, 저녁의 다채로운 빛깔과 형태를 보니, 한 자리에서 사시사철 생 빅투아르 산만 그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세잔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매일 봐도 지겹지 않을 것만 같은 싫증 나지 않는 이 광경.
이런 풍경에 '익숙해진다'는 건 어떤 것일지 잘 감이 오지 않지만, 서로에게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은 것만이 정말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한 곳에서만 살다가 죽는 사람도 있겠는데, 이런 내가 알지 못하는 대륙의 외딴 땅 끝의 삶이란 건 어떤 걸까? 어쩌면 특별한 감동이 매일 쏟아지진 않을지라도, 아름다운 곳에서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의 일상의 자리도 누군가에겐 그런 느낌 인지,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나에겐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겠다.
사실 호텔 레스토랑이 미슐렝 원스타를 받은 굉장히 고급스러운 식사를 제공하고 있지만, 저녁만큼은 로컬 레스토랑을 가보고 싶어서 미리 예약을 해두었었다. 해가 바다 끝에 거의 걸리는 시간 저녁 7시. 나는 해를 바라보면서 달리고 있었다. 예약과는 큰 의미 없이 레스토랑은 한산했다. 유들유들 친절한 웨이터에게 무엇을 먹을지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 근처 바다에서 잡히는 작은 새우튀김을 추천해 준다. 나는 튀긴 것을 껍질 째로 먹는 걸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지만, 한번 주문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바다 근처이니 원래의 기조대로 생선과 오징어, 감자 반죽 튀김을 모듬으로 먹어보기로 한다.
새우는 수염이 좀 많은 편이긴 했지만, 정말 부드러워서 내가 걱정했던 것만큼 입안에 걸리거나 텁텁하지 않은 고소한 맛이었다. 머리를 떼고 쏙쏙 먹으라는 지침에 따라, 정말 빠르게 먹어 해치웠다. 모든 재료들이 신선하고 요리도 맛있어서 높은 구글 평점이 이해가 되었다.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만큼 즉각적이고 강한 행복은 없다. 음식이 너무 맛있다고, 추천해 줘서 고맙다고 칭찬을 했더니, 웨이터는 은근히 수작을 부리려는 듯, 다 먹고 마음에 들면 소렌토로 오토바이 타고 데이트 가자고 신청해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소렌토가 그렇게 가까운 곳이었나 싶으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크게 터뜨리며 정중히 거절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해본 요상한 플러팅이었다.
며칠은 이곳에 지냈던 사람처럼 아주 편안하게 아침에 눈을 떴다. 공간의 쾌적함이란 여행의 질을 많이 높여주는 것 같아서 새삼 나도 별 거 아닌 사람이구나 했다. 조식이 포함되어 있는 숙박이었는데, 기본 메뉴가 세팅되어 있고 메뉴판을 보고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면 담당 웨이터들이 조식 서빙을 테이블별로 일일이 해주며 응대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었다. 놀랍고 황송한 아침 식사다. 계란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지금까지 이탈리아 여행하면서 계란 요리를 아침으로 먹기가 은근히 힘들었어서 갑자기 미국식 오믈렛과 팬케익을 주문했다. 애프터눈 3층 플레이팅 마냥 빵 + 과일 세팅까지 되어 있어서 과일도 충분히 충전할 수 있다. (게다가 무한으로 재리필.. 여긴 천국이다..) 눈이 찌푸려 질정도로 레몬 함량이 높은 요거트도 먹어보고, 커피도 카푸치노, 에스프레소 두 잔이나 주문했다. 누가 보면 며칠 굶은 사람인 줄 알겠다.
배 터지게 먹고 나니, 이곳과도 이별을 할 시간이다. 이제는 마지막 목적지인 티볼리를 향해 달린다. 이 곳에 스며들기에 2박 3일이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던 게 아쉽다. 한 마디로 여긴 푸름 그 자체, 그것 말고는 기억할 게 없는 곳이다. 푸른 바다와 카프리섬이 보이는 풍경이라는 게 별 것 아니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게 멈춘 듯한 신비롭고 이상한 쓸쓸함과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없는 독특함으로 기억될 것 같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추억을 남긴 마사 루브렌세 지역. 언젠가의 다음 방문을 기약할 정도로 나는 오래도록 이곳을 짝사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