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시간의 비행, 뉴욕 지하철, 하이라인 파크, 첼시
또 다시 공항!
공항에만 들어서면 차분해지는 기분. 이 기분 때문에 여행의 시작은 늘 청량한 온도로 기억된다.
나이가 어느정도 들고부터 여행 직전은 항상 비슷한 패턴을 띈다.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밀도 높은 생활을 하다가 출국날이 다가온다. 괜히 안절부절 못하면서 캐리어를 채워보지만 짐은 싸도 싸도 뭔가 잊은 것만 같고, 그러다가 내몰리듯 그대로 공항으로 향하게 되는 것. 그제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짜 여행을 위한 내면을 갖춘다. 공항은 이 과정을 훌륭히 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공간이다.
이번에는 여행이지만 친구네 집에서 지내기로 했기 때문에 가져가야할 짐도 많이 줄었다. 수건이나 위생품, 목욕용품부터 드라이기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 물품은 챙기지 않아도 되었는데, 나에게는 생소한 편안함이었다. 생각해보면 현지에서 살고 있는 지인의 집에서 머무는 여행은 처음이다. 어떤 여행이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미국 동부는 비행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길었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직항으로 14시간 반에서 15시간 정도 걸린다. 20대에는 겁없이 경유까지 해가며 여행하기도 했고 이보다 훨씬 더 걸렸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오랜 비행 시간이 가장 어렵다. 유럽 여행이 너무 좋았다며 여행을 권하면 우리 아빠는 오랜 비행 시간 때문에 가기 싫다고 손사레를 치시는데, 오래 전에는 전혀 이해가 안되었지만 요즈음은 약간 이해도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투자한 만큼 더 큰 걸 얻는 법. 여행에서 이는 피해갈 수 없는 불편함과 번거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여행들에서는 비행기에서 사육당하며 소화가 안되거나 가스가 차는게 불편했던 기억이라, 이번에는 가는 비행기에서는 "동양 채식" 옵션, 오는 비행기에서는 "과일식" 옵션을 선택해봤다. 동양 채식은 두부나 비빔밥과 함께 한국식 나물반찬이 주로 나와서 빵 같은 것은 따로 안먹어도 되서 좋았던 것 같고, 과일식은 위장이 굉장히 편안하긴 했지만 같은 종류의 과일을 너무 많이 쌓아(?)줘서 조금 아쉬웠다. 그럼에도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속이 더부룩하거나 답답한 느낌이 없어서 꽤 만족스러웠다. 대한항공에서 제공하는 컵라면은 기내식 제공 후 2시간 이후부터 서비스받을 수 있는데, 여행을 다녀온 후 난 기사에서 이코노미석은 2024년 8월까지만 제공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아쉽..)
여러 번의 긴 잠과 딴짓, 지겨운 구부정함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이 진정한 도착은 아니었다. 어마무시한 인파와 함께 입국 심사 데스크까지 다다르는 데 2시간이 소요됐다. 대포 카메라와 노트북까지 들고 간 나는 백팩 무게로 어깨가 무너지는 듯한 감각을 여행 시작도 전에 이미 겪어버렸다. 이 상황을 조용히 치러내는 사람들을 보며 전 세계 인류는 참으로 인내심이 깊다는 걸 알았다. 뉴욕은 이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일까?
친구네 집은 뉴욕 맨하탄에서 강을 건너에 두고 있는 뉴저지 북쪽 엣지워터였다. 한국으로 치면 경기 의왕, 안양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해야할까. 뉴욕시가 어느정도 규모인지 어떤 지역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몰랐던 나는 이 때만해도 기동성에 대한 개념이 하나도 없었다. 공항에서 뉴저지까지 가는 한인 셔틀을 미리 예약해놨었고, 늦은 입국심사에도 불구하고 예약자들이 모두 똑같은 상황이라 기사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11시경 도착한 비행편이었지만 1시쯤 셔틀을 탈 수 있었고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뉴저지 H마트로 향했다.
J.F.케네디 공항에서 뉴저지까지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월요일 도착이었음에도 길이 꽤나 막혀서 조금 더 걸렸던 것 같다. 이번 여행으로 나를 이끌어준 내 친구는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서류상 미국인이자 실질적인 한국인이다. 독일 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했는데, 그 때도 벨기에에서 만나 함께 여행한 추억이 있다. 뉴욕에서 일을 하며 산 지는 이제 1년이 막 지났고, 내가 '너 있는 동안 뉴욕에 놀러오겠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했던 말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입국 심사를 기다리며 완전히 소진되버린 나를 위해 친구는 스벅에서 샷추가한 두유라떼(내가 요청한 커스텀이다)까지 들고 셔틀 하차 장소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참 착한 내 친구다. 일단 배부터 채우자며 H마트 근처 피자집에서 조각 피자를 하나씩 사 먹었다. yum!
우버를 타고 친구네 집에 와서 짐을 풀고 깨끗하게 씻었다. 아, 이제야 살 것 같아!
그제서야 친구네 집의 멋진 맨하탄 뷰가 보인다. 맘먹고 가져간 비누방울 건을 개시해보았다. 언젠가 사진을 멋지게 찍는 날에 요걸 활용해볼 생각이다. 날은 화창하게 맑았다.
공항에서 빠져나와서 이동하는 데까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려서 오후 3,4시쯤 되었을 때다. 그대로 하루를 마무리 하긴 너무 아깝기도 했고 비행기에서 충분히 잠을 잔 것 같아서 친구와 함께 맨하탄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앞으로 자주 언급될 아래 사진의 이 버스는 뉴저지와 뉴욕을 이어주는 아주 소중한 말썽쟁이 버스 노선이다. NJ bus 라고 해서 우리나라로 치면 빨간버스, 혹은 시외 버스다. 택시, 우버, 자차를 제외하고 맨하탄 시내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이 버스의 시간표에 모든 나의 이후 행방이 결정된다. 이거 없으면 정말 아무 것도 못하기 때문에 여행 막판에는 정이 들었다.
뉴저지에서 맨하튼으로 가는 통로인 Port Authority Bus terminal 까지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 정류장은 서울로 치면 고속버스 터미널 정도 된다. 거의 대부분의 지하철 노선이 이 정류장에 연결되어 있고, 타임스퀘어 바로 옆 블록에 위치 해 있다. 앞으로의 여행에선 매일 2번씩 방문하게 되는 아주 중요한 스팟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맨하탄 시내 혹은 지하철로 한번에 올 수 있는 거리에 숙박을 할텐데, 뉴욕 물가는 확실히 살인적이긴 해서이렇게 되면 하루에 최소 30-40만원을 숙박에 써야한다.(한 유투브 영상에서 뉴욕 1주일 여행 비용이 700만원 정도 였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이런 점에서 친구 덕분에 참 많이 세이브를 했던 게 고맙고 또 고맙다.
뉴욕 지하철은 한국과 비교하면 참 구린 편이다. 워낙 생긴지 오래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데, 지하철 관련해서 정부에서 투자를 별로 안하는 듯하다.(개인 의견입니다.) 지하철 가격이 편도 2.9 달러, 원화로 약 4천원인 것에 비해 조금 아쉬운 퀄리티다. 일단 스크린도어가 있는 곳은 없고, 비교적 신형 차를 타면 괜찮지만, 오래된 차에는 현재 위치해 있는 역을 보여주는 전광판이나 다이오드(?) 같은 것도 없어서 아주 잘못 내리기 십상이다. 때때로 특정 칸만 에어컨이 고장나 있는 경우도 있는데, 플랫폼에서 보면 차에 아무도 안 타있기 때문에 미리 의심해볼 수 있다. 플랫폼도 한국보다 천정이 위로 높게 뚫려 있는 느낌인데 한증막 사우나처럼 뜨끈뜨끈하다. 날이 정말 뜨거운 날에는 플랫폼에서는 거의 숨을 못쉴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한국의 쾌적함이 그리워지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럼에도 지하철 안은 사람들 구경하기 딱 좋은 장소다. 정말 다양한 인종, 피부색, 머리색, 생김새를 가진 사람들이 한 데 모이는 곳. 뚫어져라 쳐다보진 않았지만 흘끔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벌써 해가 슬슬 기울어지기 시작하는 타이밍이었지만, 하이라인을 걷기로 했다. 대부분의 뉴욕 여행객이라면 한번쯤 들르게 되는 곳일텐데, 특이하게도 고층 빌딩들 사이 다리 위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을 조성해놓은 곳이다. 적절히 높은 곳에서 도시를 곁에 끼고 걸을 수 있으니 좋고, 또 주변에 나무나 풀을 예쁘게 정돈해두어서 아름다운 곳이다. 총 1.45마일, 2.3키로 정도 되는 길이기에 덥지 않으면 전체를 걸어봐도 좋은 곳 같다. 이 주변에서 일하는 직장인이라면 점심시간에도 걸을 수 있는 좋은 길이었다. 평화롭게 벤치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보며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공 공간을 만드는 일은 도시의 삶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특이하게 나선형으로 생긴 건축물도 보고 한참을 기분 좋게 걸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첫날의 나른함과 함께 뉴욕을 천천히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하이라인 산책길 끝 첼시 마켓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인 첼시 마켓은 실제로 수산물 등을 파는 도소매 시장도 있고, 내부에 레스토랑이 있는 구역도 있다. 다른 지점도 여러 곳 있다고 하는 멕시칸 로스 타코스와 굴과 랍스터를 파는 랍스터 플레이스를 방문했다. 타코 집은 줄을 엄청 길게 늘어서 있어 기다림이 필요했다. 맛은 솔직히 그냥 아는 맛이었는데, 타코에 옥수수맛에 나면서 좀 더 고소한 느낌.
한여름에 굴을 먹어본 적이 없어 약간 두려웠지만 굴은 제법 신선했고, 주문할 수 있는 종류도 다양했다. 제철은 아닌지 씨알은 조금 작은 편이었다. 두 집을 클리어하며 배도 적당히 든든해졌다. 한껏 여유로워진 배때기로 귀가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