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은 운빨이다?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말

by 언디 UnD

(Cover image generated by ChatGPT 4o)


수능 시험. 눈으로 읽어도, 소리 내 읽어도 아직까지 긴장감을 주는 묵직한 단어다. 거의 20여년 전 수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마다 수능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을 것이다. 수능이 인생을 바꿔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열과 성을 준비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고야 마는 학생들, 의지는 있으나 역량 부족으로 최선을 다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학생들, 아니면 아예 수능 같은건 별 신경도 안쓰는 마인드의 학생들, 큰 고민 없이 그냥 주어진 상황대로 흘러가는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총 2번의 수능 시험을 치렀다. 고3 수험생 시절인 2007년 수능, 그리고 재수 시절 2008년 수능.

앞선 연재글에서 밝혔듯이, 중3 즈음에 만난 영어 선생님을 통해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고, 그 뒤로 내신 시험이나 모의고사에서 영어가 어려워서 힘든 적은 없었다. 사실 한국식 영어 시험이라는게 듣기의 경우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을 수 없고, 그 외에는 독해, 문법, 어휘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한번 기저의 원리를 이해하면 점수 따기가 어렵지 않다. 과외 학생 부모님들한테 그래서 이걸 미리 잡아놓으면 다른 공부하기가 편해진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말은 거짓없이 내 경험으로 증명된 것이었다.


국어는 일주일에 한 두 번정도 대형 강의를 하는 학원을 다녔고, 수학은 소규모로 진행되는 과외같은 학원 수업을 다녔다. 사회 탐구 영역은 고2, 고3부터는 인강을 듣기 시작했는데, 지방에 살았던 나로서는 서울 메*스터디나 이*스 같은 유명학원의 현강을 듣지는 못했지만 인강을 통해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어서 충분히 도움이 됐고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그 외에는 학교에서 하는 야간자습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것으로 셀프 스터디 시간을 확보한 거 같다. 남들만큼, 놀지 않고, 딴청 피지 않고, 열심히 수능 준비를 했다.


여느 해와 같이 계절은 속절없이 변해갔고, 쌀쌀함이 추위로 변해갈 때쯤 수능 날이 다가왔다. 평소에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첫 수능 전날은 참 많이 떨려서 잠이 잘 안 오더라. 약간 뒤척이며 잠을 어느 정도 자긴 잤다. 아침에 일어나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가지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수능 시험장에 가면 교실을 확인하고 좌석표를 보고 자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내 자리가 분단 제일 뒷쪽 끝자리였다. 이런 변수들에 크게 예민하거나 영향받지 않는 편이라 상관없겠지 하며 착석을 했다. 근데 공교롭게도 감독관 선생님 의자가 내 시야에 보일 정도로 가까이 놓여져 있었다. 뭐, 감독관 선생님이 별 문제겠는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핸드폰을 걷어서 내고, 각종 부정행위에 대한 금지 방송, 시험 시간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1교시 언어영역 시험은 종소리로 시작됐고, 시동을 걸고 집중력으로 부릉부릉 달려야 하는 순간, 감독관 선생놈이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에 올리고 달 달 떨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무슨일이지?'

문제를 풀어야 하기에 마음은 급한데, 감독관 선생놈이 다리 떨기를 멈추지 않는 거다. 계속해서 신경이 그 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인드 컨트롤을 최대한 하려고 했지만, 집중력이 분산되서 문제를 읽고 읽어도 한번에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같았으면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서 좀 삼가주실 수 있으시냐고 할말을 했을 텐데, 그 때의 나는 너무 어린 10대의 학생이었고, 모든 게 너무 처음이었고, 상황 판단력과 담대함은 부족했다.


그렇게 꽤 자신이 있었던 언어 영역에서 평소와는 너무 다르게 얼떨떨하게 시험이 끝나버렸다. 당연히 이 당혹스러움은 다음 시험까지도 이어졌다. 옆에 눈이 달린것마냥 외부의 감각에 잔뜩 예민해져서, 혹시 또 다리를 떨면 어쩌지. 하며 긴장이 더해졌다. 이런 상태로 시험지를 받아들다보니 온전한 집중력 발휘는 어려웠는데 그럼에도 안간힘을 쓰고 시험을 치러냈던 어린 나를 생각하면 좀 안쓰럽다.


다행히 언어 영역, 수리 영역이 끝난 후 점심시간이 있고 그 시간 동안 좀 평정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시험이 모두 끝나고 남아있는 시험은 내 본 실력대로 치른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내 첫 수능의 기억이 아로새겨졌다.


첫 수능 결과

오랜만에 다시 확인해본 내 첫 수능 점수다. 결과가 나왔을 때 우선 언어 영역 2등급을 보고 충격에 빠졌고, 수학까지 2등급, 표준 점수까지 확인하고는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엄마 앞에서 엉엉 울며 악을 썼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왜 이런 결과를 받아야되는건데? 대체 왜?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과 원망이었다. 엄마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위로하듯 재수하면 된다고 했다. 나에게 있어서 상상도 못했던 그 '재수'가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 당시 내가 가고싶던 곳은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였는데, 이 점수를 가지고 모의 지원을 해봤을 때 합격할 가능성이 낮았다. 내가 지금까지 공부해왔던 이유는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였는데, 자존심에 결코 근방에 있는 대학은 지원할 수 없었다. 결국 점수에 맞게 조금 낮춰 연세대 사회과학계열을 지원을 하고, 나머지는 별 관심도 없던 서울 소재 대학들을 대충 집어 지원을 마쳤다. 결국은 가, 나, 다 군 모두 불합격이었다. 덕분에 유일한 대안인 재수학원으로 고민없이 직행할 수 있었다.


기억에 3월이 시작되기 좀 전에 재수학원이 개강했던 것 같다. 대학 입학생들의 새 학기와 차별화를 두려는 것일까, 일종의 배려일까. 어색하고 낯설은 발걸음을 재수학원에 들여다 놓았다. 학원 입구부터 의자가 빽빽하게 놓여져있는 강의실까지 모두 생경했다. 재수 인원이 가장 많은 학원이었기에 개강을 하자 그 빽빽한 의자들은 꽉 채워졌고, 같은 반의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듯 조금씩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재수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개강 첫 날부터 수능 전 날까지 한결 같은 생활을 하리라 다짐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학교보다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자잘한 걸 신경쓸 필요 없이, 수능을 위한 공부에만 매진하면 되었다. 하루에 12시간 넘게 꼬박꼬박 머무르면서 곧 그 낯설었던 건물이 집처럼 편안해졌다. 그 당시 수업이 다 끝나고 자습까지 한 뒤 10시쯤 학원이 문을 닫았는데, 나는 마지막으로 강의실 불을 끄고 나가고 싶어 의대를 목표로 하는 한 학생과 심리전을 벌였던 게 생각이 난다. (그 오빠는 결국 의대를 갔다고 했다.) 재수 학원은 미성숙한 어른들의 작은 사회 같았다. 남고, 여고를 다니던 학생들도 남녀가 어울려서 함께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이 와중에 연애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동성 간에도 새로운 친구 관계가 생겼다. 어쩌면 모두가 이 외롭고 험난한 길을 헤쳐가려면 함께 가는게 심리적으로 유리하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모른다.


나는 재수 기간 동안 매일 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한 만큼의 결과를 보기를 기도했다. 첫 수능 때의 허무하고 억울한 경험 이후에는 나 혼자 애써서 가는 길이 아니라, 뭔가 단단한 인도하심이 있는 길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공부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더 압축적으로 효율적으로 집중적으로 하면 그 뿐이었다. 어깨는 늘 돌처럼 무거웠지만, 하루하루 일정 분량을 채워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매일이 다음 수능 전날까지 반복되었다.


수능 시험은 졸업한 고등학교를 기준으로 치르기 때문에, 나의 시험 고사장은 고3 수능때와 동일한 학교였다. 기억이 약간 가물해졌지만 고사장 층 수도 비슷했던 것 같다. 처음과는 다르게 두 번째 수능 때는 어떤 상황이 와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평온함이 있었다. 그 전날 잠도 설치지 않고 잘 잤다. 또 다시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웃으면서 고사장으로 들어갔다. 이래서 영화 <어바웃 타임>의 아버지는 처음을 두 번째처럼 살라고 조언했던 걸까. 긴장과 낯설음에 떠는 주변 학생들을 보니 1년 전 내 생각이 나서 웃음이 슬며시 나왔다. 아, 내가 딱 저랬겠구나. 어떻게 1년 만에 난 이렇게 변했을까? 신기하기도 하고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 내가 시험 칠 자리는 앞에서 2번째였다.


나도 좀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번째 수능은 나에게 좋은 의미로 특별했다. 1교시 시작부터 마지막 제2외국어를 치르는 순간까지 힘이 든다는 느낌이 거의 없었다. 물 흐르듯 술술 문제는 풀렸고, 몇 번이고 다시 답안을 재확인하고 출제자의 의도까지 파악해볼 정도로 시간이 여유로웠다. 넉넉한 시간이 신속하게 빨리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시험은 끝났고 엄마 아빠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맛있는 저녁을 먹었던 것 같다. 수능 결과가 나오기전 가채점을 할 때에도 점수가 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수능 점수가 나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가 아래의 성적표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내 수능 성적표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모로 희한한데, 고3 수능을 치고 1년 만에 갑자기 수능 제도가 변경되어서 역사상 유례없는 이상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 재수 때인 08 수능이었다. 그 이름하여 '수능 등급제'. 결국 내 정확한 절대 점수는 수능 수험표 뒤에 깨알 같이 적어온 답을 통해 확인한 가채점 결과가 전부인 이유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언수외 300점 만점에 -5점 차감이 있었는데, (성적표 이미지에 적어두었듯이) 1등급 컷이 90인것으로 봐서는 언어 영역이 난이도가 좀 높았던 것으로 보여서, 언어에서 1개, 수리에서 1개 정도 틀렸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아마 예상치 못했던건 사회 탐구 국사에서 2개를 틀려서 2등급이 되었던 것 정도. 아쉽긴 해도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좋은 성적을 마지막 수능에서 받은 것이다. 할렐루야!


당시 자료를 좀 찾아보니 언수외탐 모두 1등급인 사람은 문/이과 통틀어 전국에서 484명, 언수외 모두 1등급, 탐구과목이 1112인 사람은 526명이었다. 나는 고로 전국 485~526등 사이에 있었던 것. 전체 수험생이 55만명 정도 되었으니 나는 당시 아마 인생 최초로 대한민국 상위 0.1%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었던 거다. 이런 내용은 사후적인 통계자료였고 수능 등급제가 새롭게 시행되다보니 재수학원 선생님들도, 대학 지원 컨설팅 업체도, 어느 누구도 이 제도가 대학 입시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정확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 나도 성적표를 받아 들고, 이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대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어디에 지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난 그저 작년 수능에 맺혔던 연세대 신방과 한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 뿐.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재수학원의 반 담임 선생님께서는 우선순위로 서울대를 지원해보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지금껏 단 한번도 서울대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목표로 삼은 적도 없는데,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결과를 두고 점수가 될 것 같으니 한번 해보라는 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 서울대를 지원하게 되면 안정적으로 내가 원하는 전공이 아닌 인문계열을 지원해야 한다는데, 나는 문학 소녀 이미지도 아니고, 나랑은 안맞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어왔다. 게다가 서울대가 다소 상향 지원이니, 연세대에 지원하고 싶으면 신방과가 아닌 작년에 불합격했던 사회과학계열을 선택해야 하는 수순이었다. 이도 저도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상황에 떠밀려가는 기분이 들어 몹시도 서러웠다. 그렇지만 주어진 기회를 그냥 포기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상담 결과대로 서울대 인문계열/ 연세대 사회과학계열에 지원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때의 선택으로 인해 나는 다음해 1월 중순까지 논술, 면접까지 이르는 입시 과정을 이어나가야 했다.


글의 제목으로 다시 돌아와서 수능은 운빨일까. 좋은 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때 다리 떠는 면접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나은 점수를 받아 그토록 꿈에 그리던 연세대 신방과에 합격했더라면, 그 뒤로 나의 인생 스토리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 편이 운이 좋았다고 믿고 살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그런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에는 분명히 나쁜 운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번 길이 틀어진 내 삶의 여정에서 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내 노력을 쏟아부을 기회가 있었다. 또 다시 다른 우연 같은 좋은 운이 주어져서 과거의 나쁜 운을 걷어차버리고 내 실력의 최상치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운빨이 아닌 것 같기도, 운빨인 것 같기도 한 나의 지나온 삶. 아직도 미스테리한 부분이 너무 많다. 아, 재미있는 건 수능 등급제는 2008년 한해 시행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다시 자료를 좀 찾아보니 당시 서울대 입시 문과 계열 전공의 정시 모집인원은 통틀어 600명 정도였다. 사실상, 가장 경쟁률이 높은 법대 정도를 제외하고 경영대, 사회과학대, 사범대 어디를 지원해도 해볼만한 게임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일은 사후적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 때 서울대, 인문대학에 지원하게 될 줄은 몰랐었고, 그것조차도 두 번째 실패로 이어질까 겁먹은 토끼처럼 떨었었다.


울며겨자먹기로 지원했던 연세대 사회과학계열은 정시 전형으로 예비 선발 합격이 되었다. 이 때 나는 모든 걸 후리쳐 던져두고 연세대를 다녀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쨌거나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니까. 그리고 서울대는 지원하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도 이전까지 잘 몰랐었다. 수능만 치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 뒤로 서울대 입시 논술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는 대치동 논술 학원을 다니게 될 줄도,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면서까지 올인해야 하는 상황으로 치달을 줄도 몰랐다. 그 당시 갑작스럽게 고액을 입시에 투자하게 된 것이 부모님께 못내 죄송했었다. 지금 같았으면 생각을 달리했을 수 있는데 나는 한번도 겪지 않은 '모르는 길'이었고, 뭐가됐든 정보는 돈이 되는 것이 입시의 세계였다.


유난히 뼈시리게 추웠던 2008년 초 겨울, 삼성역과 한티역을 오가며 빽빽한 논술학원 강의실에 다시 나를 밀어넣었다. 논술을 벼락치기로 배우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새롭게 접하는 역사, 철학, 논증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글로 생각을 풀어내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고 느낀 첫 시점인 것 같다. 하지만 가끔은 너무 서러웠다. 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서울대에 대한 로망도, 그로인한 어떠한 부귀영화도 그려본적이 없었기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3월 나는 쉽사리 떠날 수 없는 관악구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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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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