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과 탈출 욕구의 공존 상태
(Cover image generated by ChatGPT 4o)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느 나라 어떤 지역에서 태어나 어떤 언어를 쓰게 될지, 어떤 부모를 만날지, 구체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자라 날지 와 같은 것들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그냥 그렇게 돼버렸다고 해야 할지, 한 지방 도시에서 태어나 부족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 자라났다. 태어났더니 3살 정도 터울의 언니가 있었고, 또다시 몇 년이 지난 후 남동생이 태어났다.
0. 가족들과 성장 환경, 나의 내면
60년대 초반생이신 아빠는 홀로 가장 역할을 넉넉하게 해내셨고 비슷한 또래인 엄마는 평생 가정주부로 삼 남매를 돌보셨다. 경제적인 면을 보자면 부모님은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때에 사주실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으셨고, 사치와 허영을 위한 과소비는 하지 않는 성실하고 검소한 분들이셨다.
아빠의 일상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점부터는 거의 늘 같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늘 출근하셨고, 퇴근 후 집에 와 7시쯤 엄마가 차려주는 저녁을 드셨다. 그 이후에는 TV를 보면서 과일 먹고 누워서 쉬다가 잠드시곤 했다. 엄마는 매일같이 요리를 하고, 집을 정리하고, 장을 보고, 그렇게 집안과 가족들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필요한 모든 일을 했다. 일요일에는 온 가족이 교회에서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여러 활동들을 했다. 조부모님 때부터 기독교를 3대째 믿는 집안이어서, 또 모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싫든좋든 가족들이 모두 함께 그래야만 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으로서 종교 생활은 어린 시절의 나의 사고 체계,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툭 터놓고 말하면 인생살이가 고되거나 하진 않았지만, 의식 속의 나는 뭔가 말할 수 없게 답답했고, 모든 것에 적절하게 적응하고 주어진 과제에 맞게 잘 살아가는 듯했지만, 왠지 모를 탈출 욕구가 늘 있었다. 이 지방 도시, 이 동네는 나에게 너무 좁게 느껴졌고, 더 큰 세상이 환영처럼 나를 향해 빨리 이곳을 빠져나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내가 속하는 모든 집단의 사람들, 내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나와는 너무 다른 존재 같았다. 나는 늘 이방인 같았고,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 기분 때문에 자책감과 회의감이 들었다. 어른이 되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서야 나는 이런 감각들이 존재적인 '고독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로 도약할 수 있길, 내게 주어진 삶의 경계를 조금은 벗어나 볼 수 있기를 늘 마음으로 기도했다. 편안함 속에서 언제나 다른 세상을 꿈꾸고 바랐던 마음이 이후의 내 삶을 이어가는 데 일차적인 동력이 되었다.
1. 유치원 전후 시기
나로서는 거의 기억의 첫 시작 즈음인데,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몇 장면들이 있다. 집에서 만지고 읽던 어린이용 큰 책과 나무 장난감들의 감각, 아파트 옆집에 어항 속 거대한 거북이가 살던 기억. (90년대 초 즈음, 그 당시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했는지 모르겠지만 복도식 아파트에서 옆집에 방문을 한다든가 놀러 간다든가 하며 교류를 주고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파트 화단에 심겨있던 고추를 뜯어서 돌로 빻고 놀았던 기억. 언니가 타던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따라다녔던 기억이 조각처럼 떠오른다.
집에서 제법 대로변 쪽에 붙은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면 아빠의 직장인 치과가 있었는데, 왜인지 모르지만 나 혼자 점심즈음 아빠 치과에 자주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대체 울 엄마는 어디 갔던 걸까.ㅋ) 건물 1층에 '로손'이라는 편의점이 있었고 뭔가를 사먹을 때 동전을 내던 시절이었다. 5백원 짜리 동전의 촉감. 거기서 팔던 오묘한 색깔의 디스펜서 슬러쉬, 큰 컵에다가 털컥하며 슬러쉬를 채울 때의 기대감. 그리고 도시락 컵라면을 하나 사서 아빠 치과로 올라가 뜨거운 물을 부어 먹던 기억. (유치원생에게 컵라면을 허락한 우리 아빠...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지금도 내가 라면을 너무 좋아하는 것은 이때부터가 아닐까.) 진료실 옆에 붙은 원장실 방 창문으로 쏟아 내리던 환한 점심 무렵의 햇빛이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나른하고, 할 일이 없었던, 어느 누구로부터 어떤 것도 요구되는 것 없이 잘 노는 것에 골몰했던 시절이다. 아빠의 증언에 따르면, 따로 한글을 가르치진 않았지만 세 돌 되기 전에 이미 길을 지나면서 "꽃" 같은 간판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빠 기준 난 약한 수준의 천재였던 듯.)
이 때 옛날식 까만 배경에 흰 글자로 영어 자막이 씌어진 디즈니 만화영화 비디오를 즐겨 봤던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트럭에서 파는 불법 복제 비디오를 부모님이 사다주신 거였다.(한글 자막은 당연히 없어서 제로 영어 듣기 조기 교육..(?)) 이 때부터 서양 세계와 디즈니 세계관이 나에게 스며든 게 아닐까 싶다. 추가로 엄마와 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무료한 기억 시절 이후로 언니와 함께 미술, 피아노 등 각종 예체능 사교육을 했다고 하는데, 수영을 제외하고는 솔직히 기억이 거의 나질 않는다.
2. 초등학생 시절
그 후는 초등학교를 들어간 이후인데, 유치원 시절에 살던 동네보다 조금 더 깊숙이 아빠의 고향 동네로 가까이 이사를 오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입학하기 전까지 10년이 넘게 내 일상은 일반적으로 평온했고, 거의 변화가 없었다. 동네는 서울로 치면 신도시마냥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초중고 학생들이 있는 가정들이 유입되고 있었고, 늘어나는 인구 수요에 맞게 많은 가게와 생활 인프라가 생겨나기 시작한 곳이었다. 앞뒤로 적당히 산과 하천을 끼고 있었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파란 하늘을 매일 보면서 자랐다. 대부분의 장소는 걸어 다녔고, 발로 경험하며 동네 곳곳을 느끼고 배웠다. 그 시절이 내 다리가 가장 튼튼하고 건강했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학교를 마치면 학교 운동장에서 철봉을 하고 놀았다.
가끔 내 전공 배경을 듣거나 말하고 글 쓰는 것을 본 사람들은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냐"는 질문을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에 비해서 책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이었고, 읽어야만 해서 읽는 책은 지루했다.
조금 특이한 건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집에 게임기를 들여놓으셨었는데, 가장 초기 버전의 마리오를 비롯해 온갖 고전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엄마, 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도 있다. 초등학생 때는 집에 컴퓨터가 있었는데, 생각해 보면 개인용 PC를 굉장히 빨리 구입한 집이 아닐까 싶다. 약간의 MS-DOS를 곁들인 윈도우 95를 시작으로, 나는 컴퓨터에 굉장히 빠르게 적응하고 재미거리를 게임이나 온라인 세계에서 찾았던 어린이였다. 특히 유니텔과 같은 PC통신은 당시로서는 정말 완전하게 "새로운" 문물이었고, 실제로 만나지 않지만 누군가와 소통을 하는 일이 너무나 매력적인 일로 느껴졌었다.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하는 것을 실감한 인생의 첫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대부분의 영역에서 습득력이 좀 빠른 아이였다. 그런 점에서 컴퓨터라는 기기는 나에게 너무 잘 맞았다. 초등학교 3, 4학년 당시 이미 타이핑 속도가 800-900을 상회했었고, (그 뒤로 별 쓸모는 없었지만) '정보처리기능사'라는 자격증을 딸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체화하고 확장했던 것 같다. 그 당시에 내 또래의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컴퓨터를 나만큼 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온라인게임 붐이 일어나던 시절이라 실컷 게임하면서 지내다 보니, 이때부터 안경을 끼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압박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실컷 뛰어놀면서 밥 세 그릇도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초등학생이었다.
공부와 관련해서는 초등학교 3, 4학년 때쯤 처음으로 영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선행을 한다거나, 내신 대비, 수능 대비 이런 개념은 없었고 적당히 회화와 문법, 글쓰기를 배우는 ECC학원이었다. 밀도가 높거나 한 수업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당시 학교에서 배우는 영어는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3. 중학교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두발 규정이 생기고 별로 예쁘지 않은 교복을 입게 되었다. 지금도 이 시절의 사진을 보면 왜 이렇게 어눌하고 어설프고 못생겨 보이는지. 다 같이 뛰어놀던 초등학교 때와는 조금 다르게 여중을 들어가니 친구들과의 관계도 묘하게 긴장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저마다 내 짝 니짝이 생기고, 같이 다니는 무리가 형성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습기 짝이 없는데 소위 일진이라는 애들도 생겨났다. 이런 사회적 질서와 위계에 그다지 예민하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레 관계의 바운더리가 일정 크기로 축소, 유지되기 시작했다. 무리 생활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인간 집단에 약간의 이질감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중3 시절 맘에 맞는 친구들을 만나 5명이 퀸카(?!!)라는 이름으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함께 울고 웃으며 중3 시절을 보내서 참 감사한 친구들이다. 이 때쯔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소수의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내게는 그 정도 관계의 크기가 최대치였다.
온라인 커뮤니티 생활을 더 깊이 있게 하기 시작했다. 이때쯤 "인터넷 방송"(아마도 지금의 팟캐스트, 혹은 유튜브의 시초쯤이 아닐까 싶다. 나는 늘 너무 앞서나가서 시대와의 흐름을 못 맞춘다. ㅎㅎ)이라는 게 등장했다. 라디오 방송이랑 포맷은 똑같은데, 각 인터넷 방송국마다 일정한 채널을 가지고 DJ들에게 시간을 분배해 주는 형식이었다. 음악도 틀고, 사연도 읽어주면서 온라인상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었다. 어렴풋하게 나중에 커서 방송 일을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 시기도 이 때인 것 같다. 당시 그렇게 10대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가상연애 혹은 실제 연애로 이어지는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현상이 일면 사회 문제로 인식되던 시절이었고, 나 또한 부모님에 의해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지는 않도록 저지당하기도 했다.
또, '바람의 나라'라는 게임에 푹 빠져,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레벨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TMI로 한 가지 고백하자면 이때 바람의 나라에서 결혼(참고로 게임 내 결혼 제도는 로맨스에 기반하기보다는 게임 속 사냥을 더 잘하기 위한 수단이다.)이라는 것을 했었는데, 그 당시 내 배우자는 현실에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와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함께한 세월이 흘러 그가 고3이 되었고 수능을 치른다고 했다. 그에게 택배로 달콤한 간식을 담아 응원 선물을 보내주고, 손편지도 주고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꽤 귀여운 기억이다. 이 나이대는 나를 포함해 또래들이 "관계의 맺음과 확장에 대한 욕구"가 일반적으로 큰 시기가 아닌가 싶다.
길게 설명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학교 시절에도 공부에는 크게 목말라 있지 않은 시기를 보냈다. 어느 정도 노력해서 학교 시험을 준비하면 적당히 만족스러운 점수가 나왔었다. 그러다가 중2 말쯤이었을까. 처음으로 학교 시험에서 영어 성적이 훅 떨어졌다. 자존심도 상했고, 걱정도 되기 시작했다. 이때쯤 이전 글에서 언급한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영어 과외 선생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엄마 친구의 자녀들이 이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고 있어서 소개를 받았던 것 같은데,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가볍게 가볍게 스쳐 지나갔던 영어 공부를 근본적으로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교육 방식은 스파르타 식은 전혀 아니었지만 나는 모르는 건 끝까지 물어봤고, 안 되는 건 될 때까지, 최대한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면서 자신감도 점점 회복되었다. 성적이 오르니 영어가 더 좋아졌고,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 이후로 영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되었다.
4. 고등학교 시절
국어, 수학 같은 주요 과목의 학원을 본격적으로 다니게 된 건 중3 ~ 고1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선행에 초점을 맞춰서 학업을 하지 않기도 했고, 이 시절의 선행이라 하면 중3 겨울방학 때 고1 정말 잘하면 고2 수준을 한번 커버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굳이 그걸 안 한다고 해서 학교 수업을 따라가거나 하는 것에 문제가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교육은 당시 극성스러운 엄마들이 고등학교 이후를 수월하게 보내기 위해 시킨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니 모두가 여러 가지 것에 조금 더 '의식적'이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눈에도 공부 잘하는 학생/못하는 학생, 말 잘 듣는 모범생/말 안 듣고 양아치짓하는 학생 등의 프레임이 씌어지기 시작했고, 학생들끼리도 나름대로 서로를 어떤 잣대로 평가하고 내 편인지 내 편이 아닌지를 더 치열하게 가르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니 학급 실장이 된다는 건 일종의 작은 권력이었다. 선생님들은 실장을 위주로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었고, 또 실제로 어느 정도 학업 수준도 높은 학생들이 자연스레 실장에 선출되는 편이었다. 나는 애초에 권력 구조에 대한 인식이나 추구 정도가 낮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았고, 의식도 거의 못했다.
다만 언젠가부터 한 가지 내가 원칙으로 삼은 게 있는데, 바로 "수업 시간에는 절대 딴짓을 하거나 잠을 자지 않는다."다. 이 원칙을 지키느라 정말 질이 낮은 수업도 열심히 눈 부릅뜨고 듣느라 고생을 했다. 이 전까지는 대부분의 과목을 이 원칙에 따라 수업을 열심히 듣고, 필기도 열심히 하면서 공부했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어느 순간 질적으로, 양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국어 학원을 다니게 해달라고, 수학 과외를 시켜달라고 엄마한테 이야기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서 여전히 신기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수능을 준비하기 전까지는 사회, 과학 등 그 외 교과목을 사교육에 의지할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내 실력과는 무관하게 충분히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과신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솔직히 선명하지가 않은 게, 이때부터 점점 더 삶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며 무료해졌을 것이고, 최선의 노력은 다했지만 재미는 별로 없었던 이유인 것 같다. 내 머릿속에 가장 선명한 기억은 짧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800m 거리에 있던 분식집에서 치즈라면과 떡볶이를 급하게 먹었던 것, 야자 시간 종료보다 5분 일찍 나와 닭꼬치 사 먹으려다가 딱 걸려서 교복 치마 밑 종아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던 기억 정도다.(끔찍하지만, 그 당시엔 공식적으로 여학생도 다 맞았다. 그 선생은 자기의 과거를 기억이나 할까.)
정말 평범하기 짝이 없었던, 노는 걸 좋아했던,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나의 어린 시절이다. 부모님께 감사한 것은 내가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나만의 즐거움을 느낄 때 대부분의 것들은 허용을 해주셨다는 점이다. 어쩌면 부모님 입장에서는 나라는 자녀를 믿고 조금은 방임한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부모님은 그 선을 넘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셨을 것 같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안 되는 건 정말로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 안 되는 게 왜 안되는지를 이해시켜 주시거나 논리적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이 설정한 삶의 경계는 굉장히 선명한 편이었다. 나는 그것에 크게 반발하지 않고 따랐던 자녀 중 한 명.
또 한 가지 신기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 부모님과 자녀들과의 소통 방식이다. 지금 시대로 말하면 다자녀가정인 우리 집에서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전달하고 말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역량이었다. 다섯 명이나 되는 구성원들에게 내 의견을 관철하고 설득을 하려면, 여러 가지 암묵적인 룰을 따라야만 한다. 생존과 안위를 위해 자연스럽게 공정함, 논리성, 일관된 원칙 준수 같은 것들에 대해서 체득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심전심 이런 것은 우리 집에서는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소통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 것이고,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없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내 머릿속 생각을 개념화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설득적으로 전달하는 행위를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꽤나 오랫동안 나는 모든 집이 이런 줄 알고 살았는데, 외동아들로 태어나 두루뭉실한 소통방식을 가진 집에서 자란 남편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 집의 특이한 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또한 나의 정체성을 형성한 주요한 요인이자 거부할 수 없게 주어진 삶의 경계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