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를 타면 안전 수칙에 따라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에 승무원은 정해진 좌석에 앉게 된다. 이 승무원 좌석을 점프싯 (Jump Seat)이라고 한다. 이 점프싯은 손님과 나란히 있을 때도 있고 마주 보게 될 때도 있어서, 가끔 이착륙 때 승무원과 눈이 마주치거나, 종종 이야기를 나누곤 하시는 손님들도 계신다.
승무원들에게는 이 점프싯에 앉는 일이 즐겁지 만은 않다. 일단 '점프싯에 앉는다'는 일은 전쟁 같은 서비스와 기내 안전 체크를 무사히 마치고 곧 이륙이나 착륙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피로가 많이 누적돼있어 졸음이 쏟아 지기 십상이다.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손님의 시선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부릅뜨고 조신하게 앉아 미소가 있는 듯 없는 듯, 자본주의 미소를 연하게 띠며 앉아있어야 할 자리다. 정신없이 지나간 서비스를 마치고, 이 점프싯에 앉으면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초초초 초 주니어였던 시절, 억울하게 잘못을 덤터기 쓰고 사무장에게 착륙 직전까지 혼이 난 뒤에, 점프싯에 돌아가 앉은 적이 있었다. 주변에 다행히 손님이 아무도 앉아 계시지 않았었는데, 돈 버는 게 이렇게 힘들고 치사한 일이었던가...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이렇게 버티며 나를 키워 내셨을까... 하면서 서러운 마음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더랬다. 지금도 간간히 선배 승무원들에게 혼나고 돌아가는 주니어 승무원들은 가끔 그 점프싯에서 몰래 눈물을 훔쳐내기도 한다.
사실 점프싯에서 승무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승무원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최종 점검의 시간이다. 머릿속에서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교육시간에 받았던 탈출 순서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Silent Review'의 시간이다. 만약 착륙에 실패하게 되어 비상 탈출을 하게 되면, 내가 해야 할 반응에 대해서 순서대로 그려봐야 한다. 어떤 구호를 외쳐야 하고, 어떤 문을 열고 어떻게 손님들을 탈출시킬 것 인가에 대해서 다시금 조용히 리뷰를 한다. 한 번 마카오에 태풍이와 비행기가 정말 심하게 요동치던 날, 이러다 착륙을 제대로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로 잡히면서 안전벨트를 꽉 조여매고 정말 진지하게 머릿속으로 리뷰를 한 적 도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거의 잡생각에 사로 잡힐 때가 많다. 도착하면 몇 시 이려나, 딜레이 때문에 스케줄이 바뀌려나, 내일 스케줄은 뭐였더라, 아 집에 가서 뭐 먹을까, 피곤하다... 등. 가끔 우울한 감성이 터지는 날이면 이 점프싯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무는 어두운 동굴이 된다. 일에 회의를 느끼는 승무원들은 종종 점프싯에서 생각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할 정도로 이 시간은 승무원들에게는 즐거운 자리가 아니다. 하나 즐거운 점! 앉을 수 있다는 점...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기도 하는데 보통 그렇게 즐거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물론 우리를 보며 “고생 많으셨어요. 힘드시죠~” 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네시는 손님들도 계셨다. 하지만, 보통은 시답잖은 이야기나 응당 대꾸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뤘다. “너네는 연봉이 얼마니?” “아가씨는 몇 살이야?” “아니 다른 항공사에서 일하지 왜 힘들게 여기서 일해?” “애인 있어?” “핸드폰 번호 좀 알려줘 봐” “나랑 밥 먹을래?” “너 한국인이니” 등등... 그런 데이트 신청이 과연 기쁜 제안일까? 배불뚝이 대머리 아저씨가 베르사체 티셔츠 입고 검은 이를 드러내며 “너 마카오 사니? 밥 먹을래?”라고 물어보신다면... 글쎄... 난 일관된 답변을 항상 드렸다. “팅푸동 (못 알아들어요)”
한 번은 나이 지긋하신 손님이
“아이고~ 아가씨 여기서 이렇게 일하려니 힘들겠어~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머나 나 동안인가....?) 아이~ 아니에요 손님~^^ 저 나이 먹을 만큼 먹었어요”
“정말? 아가씨 몇 살인데?”
“저 27살이에요(그 당시에)”
“아이고... 많네...”
27살에 나이 많다는 인정 아닌 인정을 받았을 때,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한국 나이 여자 27살이 많은 나이 구나... 난 아직 한참이라 생각했는데...
또 한 번은,
“아가씨는 왜 에어마카오에서 일해?? 에미레이트나 어 그런데 많잖아 그런 데서 일하지 그래”
“아닙니다~ 에미레이트도 좋지만 전 여기가 더 좋아요~”
“내 조카가 말이야 에미레이트에서 일하는데, 그렇게 돈 많이 번다 그러더라고. 여기는 뭐 돈도 얼마 못 벌 것 같구먼! 다른 데로 가! 왜 여기서 일해”
“... 저도 벌만 큼 벌어요...”
이렇게 속상한 이야기를 원치 않게 나눌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의 수고를 알아주시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손님들도 많이 만났었다. 내가 만약 중국어를 더 잘했더라면, 듣기라도 더 잘했다면 아마 좋은 추억이 더 많이 쌓였을 텐데, 손님들과 더 많은 교감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
아무튼, 승무원에게 점프싯은 상징이자, 일의 연장선이자, 휴식처이자 쓸데없는 잡생각의 소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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