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도 뜨지 않은 깊은 새벽. 모두가 한참 자고 있을 새벽 4시에 그녀는 기상한다. 6시에 시작 하는 브리핑 시간에 맞추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일단 휴대전화의 아무 버튼이나 눌러 급하게 알람을 꺼버린다.
스케쥴 대로라면 늦어도 어제 오후엔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피곤함을 추스린 뒤, 다음 비행을 위해 준비를 했으면 됐건만, 애석하게도 비행은 늘 그렇 듯 딜레이 되었고 재수없게도 11시간의 미니멈 레스트에 딱 걸려 버렸다.
"말이 11시간이지, 집에 와서 씻고 밥먹고 누워서 티비라고 보려니까 벌써 8시간도 안남았어. 씻자 마자 자야돼. 그리고 내일은 4시엔 일어 나야해.나 먼저 잘게"
도대체 끝을 알 수 없는 딜레이 때문에, 5시간이면 끝나야 했던 비행이 9시간이나 걸렸다. 그라운드에서 손님들의 컴플레인 때문에 진땀을 빼서 일까, 피곤함을 이겨내려 마셨던 커피 때문인지 영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녀는 엎치락, 뒤치락 이불속을 꼬물꼬물 헤맨다.
'진짜 자야돼, 지금 안자면 진짜 내일은 더 피곤해 질거야. 자야 되는데...'
내일 브리핑은 6시, 그러면 적어도 집에서 5시 반에는 나가야 된다. 아차차 아침을 먹을 시간이 촉박하다. 조금만 더 일찍 나가서 맥도날드라도 들러 요깃거리도 사야한다. 그럼 10분 더 일찍 나간다 치고 5시 20분엔 나가야 되니까... 늦어도 4시 20분엔 씻고 준비 해야 한다. 계산을 끝낸 그녀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알람을 맞추기 시작한다.
4시, 4시 05분, 4시 10분, 4시 15분, 4시 20분.
5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추어 놓고, 그래도 불안 했는지 사내 스케쥴 사이트에 다시 들어가 브리핑 시간을 또 다시 체크해 본다.
몸은 천근 만근 너무나 피곤한데, 잠은 오지 않는다. 그녀는 애꿎은 휴대전화만 들었다 놓았다, 인스타그램을 눌렀다, 페이스북을 눌렀다, 카카오톡에 있는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들을 눌렀다. 인스타그램에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찍은 사진을 포스팅 했다. 물론 거기에 그녀는 없다. 늘 그랬듯이.
'다들 그대로네~ 보고싶다. 다음엔 나도 꼭 갈게!'
지킬 수 없는 허울 뿐인 약속인 걸 알면서도 그녀는 댓글을 남긴다.
알람이 울리기 4시간 전.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녀를 옥죄어 온다. 어차피 한 섹터 끝나면 호텔에서 자면 되니까, 괜찮을 거라고 애써 위로하면서 눈을 감는다.
....
"You shoot me down but I won't fall I am titanium"
그녀가 제일 좋아했던 노래인 titanium이 알람으로 울린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알람으로 해 놓으면 그래도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지 않을 까 싶어 해놓은 그녀의 알람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노래가 되어 버렸다. 가사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물뭍은 한지 같다. 그녀가 타이타늄 같이 강했던 때는 이제 그녀 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시간을 잔걸 까. 방금 눈을 붙였던 것 같은데, 이제 겨우 깊은 잠에 빠지려 했는데, 알람이 울렸다. 부족한 잠 때문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그녀는 차가운 방바닥에 발을 내려 놓고는 터벅터벅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는 얼굴이 푸석한 한 여자 하나가 서있다.
"아... 얼굴이 말이 아니네.."
빠른 손놀림으로 늘상 하는 화장을 솜씨 있게 해낸다. 눈밑이 영 신경 쓰였는지 컨실러를 자꾸만 바른다. 생기가 없는 것 같아 진하게 볼터치를 하고 빨간 립스틱을 바른다.
화장을 다 마치고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뒤, 일 나가기 직전에 짐을 싼다.
'레이오버가 있던 비행 전날 부터 신이 나서 짐을 싼 건 주니어 때나 하던 짓 이지.'
5분 만에 짐을 싸서는 터덜 터덜 주차장으로 향한다. 너무 피곤해서 였을 까, 술 마신 것 처럼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럽다. 운전대를 잡은 그녀는 정신을 차려보려고 창문을 내린다. 창밖으로는 아직 해도 뜨지 않았다. 어슴푸레 새벽이 밝아 온다. 아무도 없는 텅빈 거리에 그녀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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