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쌍이라는 가수가 2009년 1월에 발표한 앨범에 ‘챔피언’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최요삼이라는 권투선수가 2008년 1월 세상을 떠났고,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리쌍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했다. 그 선수는 경기 중 쓰러져서 뇌사상태에 빠졌고 많은 이들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떠났으며, 그 이후 격투기 선수들을 위한 응급시설이나 메디컬 테스트의 부실함이 주목을 받고 사회 전반의 응급 의료시설이 재 점검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작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라이트 플라이급이 뭔지도 모르고, 타이틀 1차 방어전 12라운드 같은 권투의 경기방식도 전혀 몰랐다(지금도 모른다). 권투가 스포츠라는 것을 알지만, 때리고 맞는 것을 보는 것이 불편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최요삼이라는 권투 선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때는 하고 싶은 말을 꾸밈없이 할 수 있는 랩이, 꼭 하고 싶은 말을 후렴구에서 반복해서 여러 번 할 수 있는 노래라는 것이 참 좋다, 정도의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음악이 주는 울림으로 누군가를 함께 추모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존던의 시를 다른 색 펜으로 적어놓지 않았나 싶다.
어제는 시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다녀왔다. 새아가라고 불러주시던 따뜻한 목소리, 슬그머니 오셔서 가족들 몰래 용돈이 필요하냐고 물어보시던 모습, 손녀를 보고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시던 표정이 떠오른다. 손녀를 자주 안아주고 싶어 담배를 끊으시고, 다정한 메시지로 며느리의 일상을 응원해 주시던 분이셨다. 아버님이 떠나셨을 때는,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도 영원한 우군을 잃은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아버님의 유골함 앞에서 인사를 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같이 계셨으면 좋았을 것이다’, ‘손녀들이 이렇게 많이 컸다’ 같이 아쉬움이 가득 담긴 이야기를 나눈 후 주변을 본다. 수많은 납골함 앞에 꽃과 편지와 더러는 인형과 간식이 붙어있다.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준비해 온 꽃이나 물건을 꺼내어 붙이는 순간의 모습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가끔은 어린아이의 납골함을 보면 가슴이 찡하면서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나이가 들어 주책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고 애 엄마가 되더니 오지랖이 넓어졌나 싶었는데, 2009년 4월 10일의 일기를 보고는 죽음과 추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모든 죽음은 우리를 손상시키고 우리를 추모하게 한다. 가까운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경중은 있을 것이나, 분명히 그렇다.
‘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손상시키니,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
-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던의 시
다시 찾아보니 번역자에 따라 표현을 달리 하기도 하더라마는, 손상이라는 말이 가장 적당하다 싶더라. 죽음으로 손상받은 우리의 영혼은 시간이 흘러 회복이 되지만, 추모의 시간마다 그 상처를 다시 보기도 하고 가끔은 상처가 남은 자리가 시리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