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았을까

무너진 사랑의 끝에서

by BO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날.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던 것 같기도 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보며 우리 관계가 얼마나 최악이였는지를연상케 했다.
어쩌면… 나조차도 그가 바람을 피우길 바랐을지도.
그래야 이 관계를 더는 유지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야 끝이 나니까.


우리는 마치 불같이 타올라서 서로를 다 태워 버렸고, 그게 끝이였다.

오래전부터 그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 먼저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나는 언제나 참고 인내해야 했을 때부터.

점점 녹이 슬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떠나지 않았다.


이미 멀리 떠나온 친정,

이미 낳은 사랑스러운 두 아이.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아이들은 죄가 없잖은가.


무해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나의 마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내 아이들에게는 정말 좋은것만 들려주고,

좋은것만 보여주고, 뭐든 좋은것만 해 주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는일은 없는가보다.

세상일이 내 마음처럼 되지않는걸 알았지만,

내 가정이, 가족이 내 마음 처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가 몹시 힘겨웠다.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가 있는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게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행복한 가면을 쓴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어차피 사랑은 다 그렇게 변하는 거라고,
누군가에게 바라는 게 많아질수록 관계는 금이 가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가볍게 손을 놓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쉽게,

책임감도, 죄책감도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더 편한 곳을 찾아 떠난 것인지,

진실한 사랑을 찾았는지.

이제와 내가 알게 무언가.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불행했다는 사실을.

불편한 사실이지만,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하고
서로를 위하는 척 행동하며 위선을 떨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정을 지키려고 했는데.


이제 내가 가꾼 가정이란 울타리는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동안 나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에게 모질게 대한 댓가가 너무 싸게 치러진거같아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한 것 같다.


판결문을 손에 쥔 채 법원을 나서는 순간,
나는 문득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않았다.


이혼까지 2년이라니.


그는 동의가 없이는 이혼도 안된다니,

나는 공식적인 별거신청으로 누구를 만나도 되는, 자유로운 신분이지만.

말 그대로 별거이기 때문에, 자유롭지만, 자유롭지도 않은 상태.


정말,


속상하고.

억울하다.






어느 늦여름날, 커피 타임.


바람피운 남편의 별거 요구로 속이 한참 시끄러워 머리속을 비우려 바깥 공기테라스로 나갔을 때,
우연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좀 머뭇거렸더니 들려오는 그의 가벼운 농담.


"왜? 냄새 나요, 저한테?"


나는 순간 당황해 시선을 피하며 웃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와 내 몸이 스쳤다.


그리고—


코끝으로 넘어오는 그의 향수.


짙고, 따뜻하고, 어딘가 깊이 스며드는 향.
너무 강하지도, 인위적이지도 않은,
그냥, 그 사람의 냄새 같은 그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날 이후로 이상하게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법정에서 전 남편과 얼굴을 마주했던 날에도,
홀로 아이들이 없는 집으로 돌아가던 밤에도,


그는 늘 내 머릿속을 차지했다.

눈을 감으면 스쳐지나가는 그의 얼굴이 어느새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 기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너 요즘 좀 이상해."
윤지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진짜 이상한 거 같아."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랑 친한 그 남자."
"누구?"
"…키 크고, 덩치 크고… 매일 농담 던지고 웃는 사람."


윤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묘하게 변했다.


"설마."
"…"
"야, 너 미쳤냐?"


그녀는 나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아니, 너 그 사람이랑 제대로 말 한 마디도 안 섞어 봤잖아?"
"그러니까."
"근데 왜?"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


나는 무너진 사랑의 끝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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