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재원 May 08. 2019

우린 대체 왜 존재하는가?

존재의 허무함과 이를 극복하는 힌트

가끔 너네가 왜 사는지 생각해라. 단,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그러다 자살한다(웃음)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꽤나 거친 분이어서 기대치 않았는데 저런 말을 꺼내 놀랐던 생각이 나 오마주로 서두에 작성해보았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우리 CUPIST의 사명과 비전


존재 이유는 사명 아래 몇 년간 지루할 정도로 고민해 온 질문이다. What을 알면 장사꾼은 될  수 있고, How를 알면 기업이 될 수 있으며, Why를 알면 위대한 조직이 될 수 있다고 믿으니까. 돈벌이를 위해 What만 바라보는 오합지졸들을 매달 월세 내듯 자주 봐서 생긴 트라우마도 한몫했다. 조직의 Why인 사명은 가치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는 ‘욕망 충족을 통해 진보하며 행복할 수 있는 인간에게 현재 가장 결핍된 사랑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그렇게 중학생이 되던 때부터 ‘나는 왜 사는가?’라고 스스로 물어봤던 경험으로 조직 철학을 세워갔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스스로 되물을수록 모순에 빠져갔다.


Q :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A : 우리는 욕망의 충족 가치를 믿고 사랑의 욕망 충족을 통해 이룩하려 하기 때문이다.

Q : 그것을 이룩하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A : 인류가 더 진보하고 행복할 수 있다.

Q : 인류는 왜 더 진보하고 행복해야 하는가? 이 역시 고정관념일 수 있지 않나? 오히려 인류의 진보와 행복 추구가 인류를 더 불행하게 하고 있지는 않나? 사유 재산의 발명으로 우린 끝없는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이미 기계는 인류를 초월해 인류를 길들이고 있지 않나?

A : (OMG)


더 나아가서는


Q : 왜 인류는 존재하는가? 어차피 인류는 유한한 존재이고 언젠가 멸종하게 될 개체라면 인류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오래 종을 유지하는 것,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가?

A : (OMG)


이렇게 지속해 정반합을 때려 만든 존재에 대한 스노우 볼링은 나를 허무주의로 이끌었다. 이러한 생각의 과정조차 중간 과정인지,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에 빠지다 보면 ‘어차피 유한한 인생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고민을 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고민 자체도 부정하게 되었다. 한 조직의 대표로서 터놓고 물을 상대조차 찾기 어려워, 그토록 사명을 강조했으면서 스스로 모순을 담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 방황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1여년 간 고민을 방치해뒀다가 최근에야 두 가지 힌트를 얻게 되었다.


하나는 삶은 결과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왜 살지 결정한 후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생물의 번식 활동에 의해 태어났으며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기나긴 진화의 역사에서 생존에 성공해 살아남은 것이다. 따라서 ‘왜 사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왜 살아남았는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우리 삶에 더 가깝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 문명이 가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수 있으며, 인류는 유한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설사 유한할지언정 그 존재 자체로서 가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애초에 우주의 모래 알갱이에 불과한 우리에게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모든 옳고 그름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1 더하기 1은 2인 듯 우린 법학, 수학, 과학 등 삶의 대부분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옳고 그름이 실제 자연계에 존재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그건 인간의 믿음으로 만든 약속의 산물이다. 1+1=2이고, 미국 국경이 어디까지이고, 애플 법인의 시가 총액이 얼마이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도 자연계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렇고 그래야 한다고 믿고 약속한 것일 뿐.


(나뭇잎 1개를 예로 들어보자. 나뭇잎 속 분자들이 공기 분자, 공기 중 수분 분자 등과 지속 순환하는 자연계에서 나뭇잎 1개는 존재할 수 있는가? 무한한 시간 속 우주의 분자와 원자들을 유기적으로 얽혀 1초에도 셀 수 없이 방대한 양의 세포가 분열하고 생성되며 소멸한다. 나뭇잎 1개는 우리의 시간과 편의에 맞게 ‘잠시’ 우리가 그렇다고 약속한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1cm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불과 몇백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지구가 평평하다는 것이 옳고 둥글다는 것을 그르다고 생각해 그런 자들을 이단자로 몰아 심판했다. 문명의 진보는 언제든 우리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옳고 그름은 언제나 ‘임시사항’일 뿐이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사회에 명확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 예를 들어 성매매의 합법화나 사형제도 등 역시 1차원적인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건 결국 어떤 것이 옳을지 믿는 것이다.(그리고 어느 방향으로 결정되든 우린 점차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며, 믿음의 영역인지 아닌지 헷갈려 할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의 진리는 옳고 그름에 앞서 믿음에 기반한다.



힌트들을 발견하며 결론적으로 내 생각의 흐름은 극도로 단순해졌다. 


'Stop Thinking, Just Believe, Live Present'


일련의 허무주의를 마친 내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믿음과 실존의 영역에 도달했다. 불안할 정도로 쉽게 해결되긴 했지만, 우리의 존재 이유는 옳고 그름이 아닌 ’믿음’의 문제이다. 과거에도 나와 같은 허무주의에 빠진 호모사피엔스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존재에 대해 허무함을 품고 그 허무함으로 목숨을 끊거나 의미 없는 인류의 미래에 자손 번식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흥미롭게도 현재 존재하는 호모사피엔스는 오히려 존재 자체에 대해 둔감하고 현실에 충실한 자들일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류가 언젠가 멸망하든 말든 그건 더 이상 내게 중요치 않게 되었다. 언젠가 멸종할 인류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따위의 생각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현재 인류에게 ‘사랑의 욕망’이 충족됐을 때 인류가 행복할 수 있다고 더 깊이 믿기로 했다.누군가는 이러한 사랑의 욕망이 가치를 부정할 수도 있고 갈등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젠 It doesn’t matter.

난 그것이 내 인생을 모조리 바칠 만큼 충분히 가치 있다고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2019년을 시작하며 멤버들에게 썼던 편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