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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의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 쓰기를 어떻게 바꿀까>

by 초등교사 윤수정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 저자김성우 출판유유 발매 2025.01.24.



이 책은

김성우 교수의 <인공지능은 나의 읽기-쓰기를 어떻게 바꿀까>는 최근 AI 교과서 및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이슈에 맞서 꼭 한 번은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특히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면 시간을 내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500쪽에 달하는 분량에 학술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서 술술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상당히 집중해서 읽어야 했고 이 책에서 소개하는 새로운 AI 툴을 검색하며 이해하다 보니 한 달 이상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작가는


이 책의 목차는
내가 뽑은 명문장


1.

인공지능과 리터러시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추는 인공지능과 인간 나아가 사회와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탐구하는 일입니다. p.86


인공지능이라는 기술을 단지 인간의 반대편에 놓고 생각할 것이 아닌 중재(meditation)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공지능을 이해한다는 것은 딸랑 첨단의 기술을 아는 것만이 아닌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관계를 심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본 대전제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인간의 대화와 인공지능과 상호작용을 묶는 하나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으니 그것은 바로 '경청'입니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텍스트를 읽지 않고 더 나은 프롬프팅을 할 방법은 없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글쓰기에서 프롬프트는 대화에서의 발화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프롬프트만 잘하면'이라는 구호는 텅 빈 구호일 뿐 아니라, 글쓰기를 방해하는 구호입니다. p. 259


인간의 대화에도 경청이 중요하듯 인공지능과의 대화에도 이 부분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공지능과의 경청은 '이해하며 읽기'로 그 형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 경청하지 않고, 꼼꼼히 읽지 않고는 프롬프트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응답에 대한 경청 없이 프롬프팅만 반복할 경우,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3.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비판적 리터러시'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효과적인 프롬프트를 만드는 역량에 집중하는 리터러시를 넘어. 프롬프트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 갖는 근본적 한계를 이해하는 리터러시로 나아가야 합니다. p.267


'프롬프트'가 갖는 성격을 명확히 이해함과 동시에, 질문을 잘 던지는 역량은 프롬프트를 세공하는 작업이 아니라 삶을 읽어 내려는 매일의 실천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좋은 프롬프트가 굉장히 많은 것을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프롬프팅이 놓칠 수밖에 없는 읽기-쓰기의 정수가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인공지능에 압도당하거나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그와 함께 새로운 읽기-쓰기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p.268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고 내 삶에 끌어올 수는 있지만 결국 기계가 던지는 글은 나의 삶과 경험을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개념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책에서 마주하는 한 문장, 책 속 저자와 나 사이에 깊게 파고드는 읽기 경험은 내 삶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겠지요? 결국 인공지능의 프롬프팅이 놓칠 수밖에 없는 읽고 쓰는 행위는 내 일상 속에서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매일의 실천 속에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하게 인공지능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아가되 읽고 쓰는 본질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밀한 프롬프팅을 만들어 내는 그 능력은 내 삶 속에 녹아든 읽고 쓰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지요.


작가는 이러한 일상 속 글쓰기를 '체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미미한 영역이 바로 이 '체화'인데 인공지능을 사용해 빠르게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해당 글을 우리가 체화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글의 내용과 구조 표현을 배우고 어려운 대목과 씨름을 하는 등 읽고 쓰는 행위가 우리 몸과 마음에 스미도록 하는 정성과 노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4.

인공지능과 협업을 통해, 때로는 인공지능 없이 오롯이 혼자서, 때로는 동료 연구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산책길에서 만나는 강아지와 고양이, 새들과 함께, 집에서 버스와 지하철에서 직장에서 공원에서 거리에서 '따로 또 같이' 새로운 리터러시 생태계와 실천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누군가는 침묵과 명상으로, 누군가는 화두를 품고 나서는 긴 산책으로, 누군가는 주요 사회 이슈에 대한 빠른 대응으로, 누군가는 새로운 관점의 학술 논문으로, 누군가는 인공지능의 역사와 인간의 심리에 대한 묵직한 단행본으로, 누군가는 인공지능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만화로, 누군가는 기술에 대한 경탄에 일침을 놓는 쇼츠로 함께할 것입니다. 각자 쓰지만 함께 쓰는 것이고, 함께 쓰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씁니다. 그 모든 읽고 쓰기의 과정에서 가끔 서로의 얼굴을 떠올리고, 수고와 노동에 감사하고,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에 대한 따스한 응원과 훈훈한 유머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p.485-486


작가는 사람들을 평균화하여 뭉뚱그리려는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과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각자가 써 나가는 글의 방식은 오늘날답게 다채롭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하는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은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 방식만이 옳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기계음이 가져오는 날카로움보다는 연필로 종이에 눌러쓰는 사각거리는 소리처럼 따스함을 잃지 않기를 강조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내 일상을 살고 실천하며 삶과 연결된 성찰을 통해 비판적인 리터러시를 모색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닐지요.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우지의 자세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리터러시란 무엇인가?

작가는 이 책에서 리터러시를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광범위하며 다면적인 영향을 지혜롭게 받을 수 있는 실천'이라 재정의 합니다. 세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가 자신에게 스밀 수 있도록 말글, 미디어, 다양한 기술을 조심스레 선택하고 이해하고 해석하여 만들고 이들과 소통하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빚어가는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를 평균화하지 않고 '나'라는 독자성을 가진 내 삶 속으로 인공지능을 물론이고 다양한 매체들을 가지고 와 내 삶과 연결 지어 다시 만들어 내는 실천이 리터러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공지능을 빌어 글을 쓰는 것에는 윤리적 성찰이 반드시 따라와야 할 것입니다. 이 성찰은 침묵과 공백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마치 작가가 표현한 대로 '고요 속으로 침잠하는 기예'처럼 인공지능과 나 사이의 틈을 만들고 공간을 만들어 성찰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과 살아가는 우리는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작고 작은 존재로 살아가지만 평균화되지 않고 전체화되지 않은 독자성을 유지하며 내 삶 순간순간을 더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결국 더 넓은 세계로 나를 이끌고 갈 인공지능을 대하는 삶의 지혜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침묵이 없다면, 규칙의 부재가 아니라 윤리적 정치적 또는 개인적 결정의 순간에 반드시 필요한 도약이라는 공백이 없다면, 우리는 지식을 프로그램이나 행동방침으로 간단히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이보다 더 전체주의적으로 만들 수 없다. -자크 데리다-


나의 소감

인공지능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 내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리터러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시 한번 고민해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작가의 말처럼 리터러시는 단순히 문해력을 뛰어넘은 실천이요. 지혜로운 삶의 자세로까지 연결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리터러시는 우리의 몸이 세계와 어떻게 만나는가, 다른 몸과 동식물 그리고 대지와 바다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는가로 증명됩니다."


그래서 리터러시는 숫자로 기록되는 것이 아닌 몸을 통해 마음과 세계에 새겨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리터러시는 결국 '실천하는 몸의 운동'으로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속 깊숙이 파고듭니다.


몸이 곧 텍스트이다. -엘리자베스 카로더스 헤론-



'이것도 모르다니, 리터러시가 떨어지네.'라는 판단보다는 '깊고 넓게, 무엇보다 꾸준히 배우는 모습을 보니 리터러시를 갖추었네.'라는 판단이 더욱 유효하다는 인식을 키워 가는 것입니다. p.497


내가 내린 결론


1. 고도화되는 인공지능과 협업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 단 기능을 익히게 하고 유창하게 리터러시를 구사할 수 있게 하는 것보다 더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은 역시나 '인성교육'

인공지능 활용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넘어 '인간성' 상실의 문제에 다다르지 않도록 인간미를 지닌, 온기가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일상을 삶을 소중히 살게 하고 나만 옳다는 편협한 인간이 아닌 다양성을 이해하는 폭넓은 사고와 실천이 함께하는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다.


2. 많이 알아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많이 안다는 것이 책만 판다거나 고학력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아닌 삶 속에 녹아든 배움과 경험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아는 것을 뛰어넘는 깊은 이해와 공감, 통찰을 통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배움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읽고 쓰는 삶이 지속되어야 하는 그 무엇보다 강렬한 까닭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tyNxXfZ73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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