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인 이미지메이킹 전략
직접 기술영업을 하면서 회사 대내외에서 가장 효과를 크게 본 이미지 메이킹 전략 중에 단연 페르소나 만들기를 꼽고 싶다. 페르소나란, 원래 연극에서 쓰이는 탈(mask; character)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는데 분석심리학에서 스위스 출신 정신과 의사 카를 융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도덕과 질서, 의무 등을 따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사회적으로 가면을 만들어 대내외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건데 쉽게 예를 들어 보겠다.
실제로 나는 굉장히 까칠해서 시간약속에 늦는 것,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갑자기 일이 틀어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지만 소위 와이프와 함께 일컫는 내 "대외적 페르소나"는 매우 유순하고 고객이 원하는 일정변경이나 지원요청에 즉각 대응하는 "유능하지만 유순한 회사원" 이미지를 갖는다. 회사다니면 당연한거 아니야?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페르소나 형성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집을 나서는 순간, 고객에게 전화를 받는 순간순간, 스스로 '난 친절한 사람이야, 난 상대방이 말하는 요구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라고 스스로 되뇌인다. 그래서 와이프는 내게 "넌 '대외적인 여보'의 모습이 있어. 정말 원래 여보모습을 알면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까? 이렇게 까칠한데 말이야" 라며 놀리곤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가식을 떨지 않나 싶을정도로 친절하게 굴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조금 친해지면 살짝 선을 넘나들며 친함을 은근슬쩍 과시하는데 보통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내가 선을 오히려 조금은 넘어오는 걸 반기곤 한다. 워낙 선을 아예 넘질 않으니까 선을 넘으면 반가워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대내외에서 내가 구축하는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내부이미지: 유순한데 할말 다하는 젊은 애기아빠
외부이미지: 젊어서부터 영업을 시작해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가정을 책임지는 어린 애기아빠
내가 만나는 고객들의 연령대는 아무리 젊어도 40대 초반인데, 40대 초반도 최소 10살 나이차이가 난다. 보통은 40대 후반, 50대의 의사결정권자를 만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나는 샛노란 병아리에 빨리 결혼했으면 아들뻘 되는 영업사원이다. 나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여 일부러 육아얘기를 더 꺼낸다거나, 문제의 전후사정을 다 알고 있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다는 식으로 둘러대기도 한다. 물론 상대방 입장에서 알면서도 속아주는 경우도 있고, 비록 실수했지만 열심히 수습해보겠다고 하면서 달라붙으면 오히려 젊은사람이 고생한다면서 도와주려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솔직히 젊은 애기아빠라며 도와주려는 고객들에게는 정말 감사한 부분이 많다. 다른 경쟁사와 특별한 제품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내 페르소나를 믿고 나를 더 도와주려고 하고 신경써주는 부분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분들에게는 나도 모르게 더 잘해드리려고 하고, 납품일정이나 품질적인 부분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챙기려는 부분들이 생긴다. 즉 내 페르소나를 통해, 서로 소소하게 설날, 추석선물도 부담없이 주고받으면서 관계가 더 깊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만 회사 내부적으로는 유순하게 다른 부서의 편의를 봐주면서 업무를 하려고 하지만 과도한 부서이기주의가 보일 때면 한마디씩 쏘아붙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가면 쓰고 있던 가면을 던져버리고 까칠한 인간상으로 돌아오지만... 문득 까칠한 인간성을 다 받아주고, 오히려 이해해주는 아내에게 정말 고마움을 느낀다.
정리해서 생각해 보면, 내 본모습은 영업에 크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까칠하고, 시간약속을 비롯해 모든 스케쥴을 관리하려고 들며, 남의 비위맞추는 것도 싫어한다. 그래도 내가 영업을 하면서 나만 찾는 고객들이 있고, 경쟁사 가격이 비싸더라도 내게 먼저 물어봐주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고객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페르소나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 아니, 영업은 내가 전혀 섞이지 않은 내 페르소나가 한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아무리 일이 본인 성향과 맞지 않아도, 그 일에 맞는 가면을 만들어 쓸 수 있다면 사실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것 같다. 영업도 그 많고 많은 가면의 일부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