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후, 쉼표 6-2

제6-2화. 버티는 법을 배운 시간, 그리고 새로운 시작

by 심행

회사에서의 8년은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시간이었다.

처음엔 그렇게 믿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했고, 마감이 다가오면 야근과 주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했고, 그 당연함이 곧 나의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 기준이 모든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팀장이 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새로운 팀. 대부분이 첫 직장이었다.

그들에게 회사는 '처음'이었고, 내가 익숙하게 여긴 문화는 낯설기만 했다.

"왜 이걸 해야 하죠?"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대답을 더듬었다.

처음이었으니까. 나도 팀장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생각보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잘 해내고 싶었다. 내 기준으로, 내 방식대로 팀을 이끌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언어였고, 나의 속도였다.

10분 일찍 출근하고, 촉박한 일정 앞에서는 책임감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내 기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퇴근 시간이 지나면 메시지 확인조차 부담스러워했고, 실제로 다음 날 출근 시간에 답장을 확인하고 주었다.

일이 자신의 성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굳이’ 하려 하지 않았다. 혹은, 미완성된 성과로 책임을 넘기고 싶어 했다.


서로의 기준 차이는 점점 간극을 넓혔고, 나는 매일 지쳐갔다.


경고가 통하지 않는 잦은 지각과 미완의 업무, "몰라서 못했다"는 대답.

결국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아왔다.

하루 평균 14시간을 일하며, 휴가는 사치가 되었다.

설명을 포기했고, 감정을 감췄다.

무엇보다 무서운 건 그 모든 상황에 무뎌져 가는 나 자신이었다.


나를 따르던 이들도 하나둘 멀어졌다.

남은 것은 ‘존중 없는 비난’이었다.

조용한 조롱, 익숙한 험담, 차가운 시선들.

그때, 나는 나와의 약속을 떠올렸다.

"최소 2년은 버티자."

그 말을 붙잡았다.

앞만 보지 않기로 했다.

하루만, 딱 오늘 하루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하지만 생각은 나를 밤마다 괴롭혔다.

퇴근 후에도 멈추지 않는 회전문 같은 고민들.

그래서, 나를 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한 게 러닝이었다. 달리기.

밤거리를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마음속 무력감이 잠시 가라앉았다.

뛰고, 자고, 일하고, 다시 뛰었다.

그렇게 하루씩, 일주일씩, 한 달씩, 나는 버텨냈다.

그 1년이 지나고, 결국 회사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나의 팀도, 자리도 사라졌고, 급여는 두 달이나 밀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무너졌기에 다시 일어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버티는 법’을 배웠다.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내딛는 것, 그게 삶을 바꾸는 시작이란 걸.

이제 나는 쉼표를 찍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쉬어보지 못했던 그 쉼표.

그리고 처음으로 진짜 쉬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번엔 단 하나의 키워드로 시작했다.


‘새로움’.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들에 도전해 보기로.


퇴사하던 날, 피부과를 예약했고, 제모부터 피부 관리까지 몽땅 갈아엎었다.

그림, 글쓰기, 스쿼시, 카페에서의 공부, 헬스까지…

하고 싶었지만 미뤄두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시작했다.


지금 나는, 다시 숨을 고르고 있다.

어디로 갈지, 어떤 길을 걸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젠 두렵지 않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해준다.

“지금 너무 힘들다면, 딱 오늘 하루만 해보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러다 보면, 진짜 괜찮아질 거라고.”

그러니 오늘도, 천천히. 한 걸음, 그 한 걸음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브런치 작가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9년 후, 쉼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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