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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Oct 30. 2023

성수동

여러 겹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

어제는 식구들과 함께 성수동을 걸었다. 점심 먹고 잠시 쉰 다음 두시 가까이 되어 집을 나섰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눈이 몹시 부셨다. 요즘은 가방에 꼭 선글라스를 챙겨 다녀야 할 듯하다. 


보통 우리는 야외에 나갈 때에나 선글라스를 챙기지만, 실은 도시야말로 선글라스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유리와 금속으로 지은 건물이나 밝은 색으로 포장된 보도는 햇빛을 심하게 반사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눈이 부실 뿐만 아니라, 자외선이 망막 등 눈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자외선을 차단해 주는 구름이나 공기 중 습도가 낮은 가을엔 생각보다 자외선이 강하다. 


그런데도 유난을 떠는 것처럼 보이기 싫은 마음과 깜빡 잊곤 하는 건망증 때문에 늘 선글라스 챙기는 걸 잊고 그냥 길을 나서곤 하게 된다. 집 밖에서 눈이 부시고 나서야 ‘아, 선글라스를 두고 나왔네’ 하는 생각이 드니, 어이가 없고 안타깝기도 하다. 


어제도 그렇게 눈부신 가을하늘 아래 우리는 성수동을 걸었다. 성수동은 여러 층이 중첩된 동네다. 14세기부터 22세기까지 무려 800년 동안 한 나라의 수도인 도시 서울에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이곳은 그것이 한눈에 들어오는 독특한 곳이다.


내가 처음 알게 된 성수동은 물류 센터로서의 성수동이었다. 1998년부터 1년 좀 넘게 빨간펜 선생님을 했었는데, 책을 받으러 성수동에 있는 교원 물류센터에 몇 번 들른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성수동은 창고와 공장 같은 커다란 건물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7, 80년대 을지로와 구로공단이 합쳐진 그런 느낌이랄까. 지금 생각하니 IMF 직후라 몹시 어려웠을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요즘과는 또 다른 활기가 있었다. 모두 열심히 일했다. 일곱 살과 돌 지난 아이 둘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나온 나도 열심히 살았다. 


나중에 알게 된 성수동은 가죽 가공과 구두를 만드는 업체가 모인 곳이었다. 그런 성수동은 같은 구두라도 명동이나 광화문이 아닌, 서울역 근처 염천교 수제화 거리나 아웃렛 매장이 늘어선 용산역 근처가 생각나는 곳이었다. 


지금도 성수역 가까이 새라 매장이 있다. 어제도 까만색 단화를 무려 3만 4천 원에 사 왔다. 3년 전 가을 이대점에서 10만 원 정도에 구입하면서도 많이 할인받았다고 좋아했는데, 어제는 그 가격이라니. 


물론 신상도 아니거니와 진열된 물건 외에 다른 재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신어보고 맞으면 그 물건을 그대로 가져가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래도 품질과 가격이 좋으니, 마음과 발에 맞는 것만 있다면 횡재하는 셈이다.


최근에 만난 성수동은 맛집과 카페, 트렌디한 가게가 들어찬 힙한 동네, 핫 플레이스다.  가격을 보면 이미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딸기우유 한 병에 9,500원, 시그니쳐 커피 한 잔에 2만 원이라니(대림창고), 원가나 인건비 상승 탓만으로 돌리기엔 부자연스러운 가격이 아닌가. 


이 동네엔 문방구보다는 문구점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포인트 오브 뷰라는 곳이 있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1층부터 3층까지 전부 문구점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말이면 줄을 서서 입장을 한다. 대기자가 줄을 서 기다리는 문방구라니. 


물건은 별거 없다. 오히려 이 건물이 대체 옛날엔 어떤 모습을 한 집이었을지 궁금하다. 독특한 것을 찾자면, 1950년대쯤에 멈춰버린 취향의 상품이 가득하다. 놋쇠와 종이, 유리, 나무로 만든 소품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아빠 책상에 기어 올라가면 볼 수 있던 물건들을 보고 추억에 젖는다. 


하다못해 직원용 아이맥을 비치한 장롱이나 서랍장, 진열장, 책상도 할머니가 쓰시던 딱 그때 것들이다.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 좋은 건 다 가져가고 그지 같은 것만 마당에 팽개치고 가 닦아서 쓰셨다는 가구들. 그래도 나에겐 갖가지 물건을 뒤지며 상상의 나래를 펴던 공간이었다.


어쨌든 성수동은 많은 것이 중첩된 독특한 동네다. 아직도 돌아가는 공장과 창고, 수많은 업체가 있고, 동네 점빵부터 디올 매장까지 다양한 가게가 있다. 그뿐 아니다. 전철역에서 좀 떨어진 곳은 학교와 주택, 아파트 단지가 있는 주거지이기도 하다. 


최고기온 24도. 볕은 뜨겁고 그늘은 썰렁. 복작대는 인파 속을 걷다 보면 피곤하다. 7천 보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 지친다. 그러다 보니 잡다한 것을 먹고 마시게 된다. 걸으면서 초콜릿우유와 물, 카페에 들러 아메리카노와 밀크티를 마시고 갈릭 버터 토스트를 먹었다. 그 사이 편의점에서 소시지도 하나 먹었다. 돌아가는 길엔 미숫가루와 개성주악을 하나씩 먹고, 전철역에선 따뜻한 어묵으로 마무리했다.


너무 잡다한 것을 배고프다고 허겁지겁 먹었나 보다. 위가 불편해 소화제를 먹고 저녁을 걸렀다. 따뜻한 물도 마시고 다스리다 보니 10시. 무장아찌에 찬밥을 조금 먹고 잤다. 그리고 4시. 네 시간 자고 일어나 이렇게 글을 쓴다. 지금 시간은 5시 반. 여섯 시간 이하로 자면 좋지 않다는데, 들어가서 다시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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