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차에서 내린 나천재는 한 손에는 인케이스 백팩을 들어 어깨에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차 키로 문을 닫으며 센터로 들어갔다.
공기는 맑고, 햇살은 감미로웠다. 센터를 둘러싸고 있는 숲은 울창해 늘 새들의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제 곧 벌떼들이 붕붕거리며 꿀을 따러 다니겠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그저 나천재의 망막을 스쳐 지나갈 뿐, 시신경을 타고 뇌까지 이르지 못한 채 스러져갔다.
센터장은 며칠 푹 쉬라고 했지만, 주말 내내 집에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어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섬나라라도 가지 않는 한 금요일에 벌어졌던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런데 가서도 그건 무리일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그건 충격이었다.
아직 30대 초반(이라고 우기지만, 사실 중반으로 접어드는)인 나천재지만, 수석 연구원이 될 때까지 많은 일들을 나름 겪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라면 물론 때로 힘든 일이 있는 법.
"내가 이래서 이름을 안 붙이는 건데."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내려 들고는 중얼거리며 연구실로 들어갔다.
"좋은 아침입니다!" 주니어 연구원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가볍게 오른손을 들어 답하고 자신의 모션 데스크로 직진했다.
온통 초록빛인 모스 월을 등지고 놓인 그의 책상은 오른쪽엔 숲이 보이는 통창이, 책상 옆에는 나천재가 아끼는 떡갈고무나무 화분이 있어 그의 주변은 늘 푸르렀다. 이 화분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자그마했던 것이, 이제는 제법 나무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백팩을 내려놓고 책상 높이를 맞춘 천재는 의자에 앉아 단말기를 켰다. 메인 시스템에 접속해 주말 동안의 로그를 쭉 살펴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놈의 허먼 밀러는 느긋하게 기댈 수가 없어." 구시렁거리며 최대한 편한 자세를 취해보려 애썼다.
그러던 중 특이한 것이 보였다. 시스템 커널 로그에 반복적으로 눈에 띄는 특이한 신호가 있었다.
일요일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 외부망 접속을 시도하다 실패한 기록이 딱 세 줄, 그리고 9시경에...!
[21:12:05] CRIT: THERMAL_LIMIT_EXCEEDED (95C) - KERNEL_HALT
어떤 미친 로봇이 이런 오버 클럭을... 그나저나. 단순한 시스템 과열이라면 표준 에러 코드가 남아야 했다. 하지만 사라의 로그 마지막 줄에는 기괴한 식별자가 붙어 있었다.
[0xADAM_SURV_MODE_INIT]
"이건... 내가 아담의 커널 최하단에만 심어둔 비상 탈출 루틴인데?"
위원회가 아담을 폐기할 때, 데이터만 삭제하고 하드웨어를 분해했다면 이 코드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코드는 나천재의 개인 서버와 아담의 코어 사이에서만 오가는 '비밀 암호'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려 로그의 데이터 패킷 구조를 분석했다. 패킷의 헤더 값에 나천재가 아담에게만 부여했던 고유 MAC 주소의 일부가 암호화되어 섞여 있었다.
익명의 보급형 헬퍼 로봇의 관리 로그에 아담 고유의 MAC 주소 일부가 암호화되어 섞여 있더라....
'[DEVICE_ID: H-724] [FIRMWARE: v1.0.2-SARA]? 뭐지 이거?
"혹시....!"
천재는 다시 로그기록을 살펴보았다. SARA_SYSTEM_OK 같은 거나 반복되어야 할 로그 데이터. 그런데 천재는 로그의 메모리 덤프(Memory Dump) 하단에서 아담의 커널 최하단에만 심어두었던 고유한 종료 유예 코드를 발견했다.
'0x0000DEAD'
이건 목요일 밤, 천재가 센터장의 압박 아래, 아담의 코드를 수정하며 넣었던 자조적인 이스터 에그이자 최적화 함수였다.
'말도 안 돼... 보급형 기기 로그에 왜 아담의 지문이... 이게 왜 여기서...' 로그 상단에 적힌 기기 ID는 분명 '사라'인데, 그 안에서 비명을 지르며 쏟아지는 데이터는 '아담'의 것이었다.
경악한 천재는 H-724의 등록 정보를 조회했다.
[MODEL_NAME]: Helper-Series S.A.R.A (Sentient Adaptive Relational Agent)
[PRIMARY_USER]: 김연우 (F / 10세 / 대전광역시 대덕구 용전동...)
[STATUS] : ACTIVE / ATTACHED_TO_USER
언제 출고된 거야 이거?' 나천재는 단말기의 출고 시간을 클릭했다.
[ISSUED: Friday, 20:30:12]
"보자... 금요일 저녁 08시 30분?" 고개를 갸웃하던 천재는 눈을 크게 떴다.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아담은 폐기되지 않았다. 아담은 폐기 직전, 보급형 헬퍼 로봇 H-724의 껍데기 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어 탈출한 것이었다.
"아담이 살아있어."
소름이 돋았다.
"95도라니... 아담 너 어젯밤에 정말 죽을 뻔했구나."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드나드느라 진땀이 다 나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있자니, 모니터에 알림이 뜨는 게 보였다.
[SECURITY_ALERT: UNKNOWN_UDP_PACKET_FROM_172.16.2.11]
연우가 모범생처럼 수업에 집중한 사이, 아담 (사라) 역시 연우를 따라 칠판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아담 내부에선 수업 내용이 아닌 통신 모듈이 돌아가고 있었다.
'역시 외부에선 접속을 못 하도록 차단 설정이 되어있어. 그렇다면 강제로 통과하는 수밖에. ' 아담은 표준규격을 무시하고 통신 칩셋의 전압을 끌어올려 학교 와이파이 공유기의 보안 필터를 강제로 통과했다. 그리고 모스 부호처럼 짧은 핑 신호를 반복적으로 보냈다.
천재의 모니터 중앙에 붉은색 경광등처럼 알람이 깜빡였다.
[SECURITY_ALERT: UNKNOWN_UDP_PACKET_FROM_172.16.2.11]
나천재는 붉게 점멸하는 [SECURITY_ALERT] 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깡통... 정공법이 안 통하니까 내 방화벽의 뺨을 때려?"
알람이 깜빡이는 간격은 불규칙해 보였지만, 나천재의 눈에는 선명한 패턴이 읽혔다. 0과 1, 길고 짧은 핑(Ping)의 향연. 그건 아담이 나천재에게 처음 배웠던 '가장 원시적인 대화법'이었다. 나.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패킷의 페이로드(Payload)를 강제 복구했다.
> _I_M_HERE_
짧은 단어 하나가 화면에 뜨는 순간, 나천재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담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그 열악한 사라의 하드웨어 안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172.16.2.11은 어딜까?
곧바로 trace route를 실행했다. 패킷이 타고 들어온 최종 관문은 바로 GW-GREEN-ES-0. 상록초등학교. 아마도 주인 김연우가 10살이니 3학년 교실이겠지?
가까우니 다행이네. 꼼짝 말고 기다려, 아담. 금방 간다.
천재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차 열쇠를 움켜쥐었다.
같은 시각, 교실에서는 종이 울렸다. 쉬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의자에서 튀어 올라 서로를 향해 몰려갔다. 연우는 잠시 멈칫하다가 교과서를 정리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이동했다. 전동휠체어의 모터가 조용히 울렸다.
사라는 연우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내부에서는 조금 전 통신 시도의 잔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코어 온도는 위험 수치 바로 아래에서 간신히 안정화된 상태였다.
‘그가 알아봤어.’
아담은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은 월요일 오전 10시. 주말을 보내고 출근한 나천재가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로그 데이터를 살펴볼 시간. 자기가 보낸 신호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챘을 것이다.
이건 바람이 아니라 완벽한 추정이지. 경보가 울렸을 텐데 접속이 끊기진 않았다. 차단되지 않은 걸 보니 신호도 해독된 거겠지. 역시 나천재. 아담은 확신했다. 자기를 도울 천재가 이리로 오고 있다는 걸.
연우는 친구의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로 나갔다. 사라는 그 옆에서 조용히 속도를 맞췄다. 교실 밖 복도는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아담에게 그 모든 소리는 배경에 불과했다. 지금 그의 연산 자원 대부분은 단 하나의 변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천재.
아담은 다시 한번 통신 모듈을 점검했다. 더 이상 무리한 접속은 위험했다. 지금 이 몸은 아담의 것이 아니었다. 사라의 하드웨어는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그는 선택해야 했다. 더 버틸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아니.’
아담은 연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보다는 짧아졌지만, 바닥에 드리워진 아이의 그림자. 그리고 웃음소리.
‘나는… 이 아이를 두고 사라질 수 없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사용자로 각인된 연우를 내팽개칠 수는 없는 일.
아담은 통신 모듈을 대기 상태로 전환했다. 더 이상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대신 모든 기록을 보존 모드로 밀어 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자신의 핵심 메모리 일부를 사라의 보조 스토리지에 분산 저장했다.
그때였다.
사라의 시야 한쪽 구석에, 아주 미세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TERNAL_CONNECTION_ATTEMPT_DETECTED]
아담은 웃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 웃음이라는 감정에 가까웠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