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와 사라는 데크길을 지나 한남대 캠퍼스로 들어갔다. 데크길은 장애물 없이 평탄화되어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경사길이다 보니 지그재그로 왕복하는 구간이 있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그런 건 없다. 계단만 피하면 보배네 가게까지 금세 갈 수 있다. 중간에 센터장이 보냈다는 회수팀만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지.
나지막한 옛날 집들이 모여 있는 곳에 다다랐다. 한적했다. 간간이 새소리만 들렸다. 린튼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마을은 마치 시간이 박제된 것만 같았다. 붉은 벽돌과 검은 기와, 그리고 오월의 신록. 맑고 맑아 눈이 부셨다. 손에 쥐고 꾹 짜면 초록빛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물? 사람인 연우는 갈증을 느끼겠지? 사라는 백팩에서 텀블러를 꺼내 연우에게 내밀었다.
"연우야, 물 마셔."
"고마워."
목이 탔는지 꼴깍꼴깍 물을 잘도 마신 연우가 말했다.
"얼른 가자."
"그래."
둘은 학교 담장을 따라 내려갔다. 휠체어가 경사길을 따라 내려가다 가속도가 붙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서두르면서도 너무 빠르지 않게. 큰길까지 10분. 이제 10분 안에 가게까지 도착하기만 하면 세이프.
"연우야. 이제 길만 건너면 돼."
"알았어. 어서 가자."
"응."
횡단보도를 건너 오락실 뒤로 들어갔다. 공터를 지나자 붉은 기와에 벽은 하얗게 칠한 3층집이 갑자기 나타났다. 나무로 된 미닫이 출입문 옆에는 '보배네 밥집'이라 적힌 나무 간판이 달려 있었다. 아이가 그린 것 같은 숟가락 젓가락 그림도 새겨져 있었다.
"여기다. 다 왔어, 연우야!"
"보배네 밥집? 여기 맞아?"
"응."
"그럼 들어가자."
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안에서 예쁘장한 아가씨가 나왔다.
"사라? 연우 맞지?"
보배는 두 사람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옆으로 비켜서며 손짓했다.
"얼른 들어와. 오빠한테 연락받았어."
둘 다 가게 안으로 들어왔지만 보배가 내주는 의자에 앉아 말없이 한참 동안 보배를 바라보기만 했다.
보배가 카운터 뒤로 돌아가는 사이, 연우가 사라를 잡고 가만히 말했다.
"사라야, 나 저분 어디서 본 거 같아."
"응? 어디서?"
"글쎄.... 혹시...."
그때 보배가 연우에게 컵을 건네며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목 타겠다. 어서 마셔."
"네. 감사합니다."
연우는 물을 받아 마시면서도 계속 보배를 바라봤다. 어디서 봤는지 생각해 내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나 보네?"
"네?"
연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배가 턱으로 휠체어를 슬쩍 가리키며 말했다.
"그때 그 사고 말이야. 이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고 듣진 않았는데. 후유증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어. "
"네에?" 연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기억 못 하는구나? 그때 빗길에서 트럭에 치일 뻔했었잖아. 너 맞지?"
"어떻게.... 그걸?"
"후훗. 아무래도 사고당한 사람이 그때 상황을 잘 기억하긴 어렵지. 그래도 좀 서운한걸? 구해준 사람도 기억 못 해주니 말이야." 보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연우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 언니가? 나, 날 구했다고요? 죽은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 있었어요?"
"죽은 줄 알았어? ㅎㅎㅎ"
"네! 그때 분명히... "
"그래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지. 나도 충격이 컸거든."
그날. 작년 이맘때.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연우는 한남대 정문 앞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경사로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리던 트럭이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연우를 그대로 덮치려는 찰나, 한 젊은 여자가 순식간에 연우를 낚아채 옆으로 굴러 사고를 막았다.
무리한 운행으로 깜빡 졸았던 운전자는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빗길에 미끄러져 버렸던 것. 인사사고는 면했지만, 교차로에 설치된 신호 조절기 등 여러 시설물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구조대가 와서 여자의 품에서 연우를 빼내어 구급차로 실어갈 때까지 여자는 깨어나지 않은 채 계속 쓰러져 있었다. 연우는 자기를 구한 사람이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지금 보배를 다시 만나고 자기가 연우를 구한 사람이라고 밝히기 전까지.
연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흐흐흑. 전 저를 구하고, 저를 구하고 대신 죽어버린 줄 알았어요. 저 때문에... 흐흐흑. 그런데 이렇게 살아 계시다니 정말 다행... 다행이에요."
사라는 흐느끼는 연우의 어깨를 꼭 껴안고 보배를 들여다봤다.
"나도 꽤 충격이 컸나 봐. 금방 오빠가 와서 데려가긴 했지만 그때까지 그대로 쓰러져 있었대."
"석차돌 연구원님이 오빠였군요."
"응. 맞아. 천재 오빠 친구기도 하고."
"석차돌, 돌차돌, 앞 뒤가 똑같은 짱돌차돌...."
"어라? 너 어떻게 아니? 그거 우리 오빠가 정말 싫어하는 건데."
"아, 실례했습니다. 제가 무심코 잘못 말했어요."
사라는 깜짝 놀랐다. 연구실에서 아담이었을 때 유치하게 차돌을 놀리던 천재 음성 떠올라 무심코 입으로 나와버렸던 것.
[시스템 경고: 비인가 언어 데이터 출력됨. 아담(ADAM) 아카이브와의 동기화율 일시적 상승.]
사라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방금 그 말은 사라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사라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진짜 자신'의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조심해. 우리는 석 씨지만, 돌 석자가 아니야. 옛 석자를 쓴다. 박, 석, 김! 석탈해 모르니? 신라 왕족 출신이라고."
"죄송해요. 조심하겠습니다."
혼나다 보니 연구실에서 사과할 때 쓰던 말투가 사라의 헬퍼 로봇 프로토콜을 이기고 튀어나왔다.
"석 씨는 까치가 알려준 성씨다. 우리 집안은 예부터 귀한 걸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거든. 연우야, 너 구한 것도 우리 집안 내력이라 치자. 알았지?"
"네, 네!"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카리스마. 연우도 사라도 어쩐지 살짝 기가 죽는 듯했다.
"울지 마, 나 멀쩡하잖아. 자, 이걸로 눈물도 닦고 콧물도 닦아. 으. 지지다 지지."
보배가 식당에서 쓰는 종이 냅킨을 건네며 말했다.
"참, 얘들아. 엄마한테 연락은 했지? 여기 온다고."
"헙. 아니요. 급하게 오느라 깜빡했다. 어떡하지?"
걱정하는 연우에게 사라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했어."
"와, 잘했다. 역시 사라야. 엄마 걱정할 뻔했다. ㅎㅎㅎ"
"연우야, 울다 웃으면?"
"야!"
그 시각, 연우네 집 뒷마당.
"꽃 피이이는 동백섬에에~" 연우 엄마는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를 가꾸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잔디 깎는 일은 주말에 남편이 한다고 해도, 돌틈에, 화단에 구석구석 잡초는 어찌나 잘 돋아 나는지. 이쪽을 뽑고 나면 또 저쪽이 무성하다. 쪼그리고 앉아서 해야 하는 일이라 힘들기 짝이 없다.
어서 마저 끝내고 모히또에서 몰디브라도 한 잔 마셔야지. 차가운 탄산수에 라임과 애플 민트를 넣어 마실 생각을 하니 저절로 손이 빨라졌다.
5월의 햇살과 노동 뒤의 모히또 한 잔. 참 평화로운 오후였다.
하지만 그 평화 아래, 거실 구석에선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콰득, 콰드득. 아까 불빛이 반짝이며 몸을 부르르 떠는 녀석을 발견한 뭉치는 좋은 장난감이다 싶었는지 제 집에 감춰뒀다 아작아작 개껌처럼 씹어대고 있었다.
사라의 긴급 메시지 도착으로 알람을 띄우던 단말기는, 이미 뭉치의 날카로운 앞니에 으깨져 침범벅이 된 채 생을 마감하고 있었다. 사라의 메시지와 함께.
연우의 집 앞, 연예인들이나 탈법한 커다란 차량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리더니 벨을 눌렀다.
띵동~
땡볕에서 잡초를 뽑는 일을 마친 엄마가 부엌에서 모히토를 만들어 벌컥벌컥 마시고 있을 때였다. 부엌에 설치된 코콤 단말기 화면을 들여다봤다. 웬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집 앞에 서 있었다. 무시했다.
띵동~
띵동~
무시하려 해도 계속 눌러대는 통에 견딜 수 없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안 사요."
"네?"
"안 산다고요. 다른 데 가보세요."
"인공지능 연구센터에서 나왔습니다. 헬퍼 로봇 관련입니다."
"헙!"
깜짝 놀란 연우 엄마는 현관으로 달려갔다.
"실례했어요. 신분증 확인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신분증에는 '인공지능 연구센터 보안 2팀 고원영'이라고 나와있었다. 신분증을 확인한 연우 엄마가 말했다. "죄송해요. 잡상인인 줄 알았어요."
"괜찮습니다. 요즘 같은 때 잡상인 아니라도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면 곤란하죠."
"더운데 수고 많으시죠. 들어오셔서 찬 거 한 잔씩 하세요."
엄마는 센터 직원들을 식탁으로 데리고 가서 방금 만든 모히토를 한 잔씩 대접했다.
모히토를 한 잔씩 대접받은 뒤, 2 팀장이 본론을 꺼냈다. 연우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 사라가 위험하다고요?"
연우 엄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고원영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2 팀장이 차 안에서 지시한 내용이 귓속에서 맴돌았다.
'엄마한테 로봇이 결함이 있다고 해. 연우를 인질로 잡고 있을 수 있다고. 그래야 협조를 끌어낼 수 있어.'
"네, 저희가 점검 과정에서 일부 이상 징후를 발견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문제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 확인이 필요해서요."
"이상 징후라면 어떤?"
"그게..."
고원영은 말을 고르며 시간을 끌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재 형한테 연락이 닿기를 바랐다. 아까 차에서 몰래 보낸 메시지. 답장은 아직 없었다.
"정확히 어떤 결함인지 말씀해 주셔야 저도 판단을 하죠."
연우 엄마는 팔짱을 끼며 물러서지 않았다. 고원영은 이 어머니가 만만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사실은..."
그때 뒤에서 2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고 요원, 뭐 하나. 시간이 없어."
2 팀장이 연우 엄마 앞에 서더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어머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댁의 따님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해당 로봇에서 심각한 결함이 발견됐고, 현재 연우 양과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입니다. 로봇이 아이를 통제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요."
연우 엄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게 무슨..."
"저희가 즉시 회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연우 양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고원영은 2 팀장의 옆에 서서 눈을 내리깔았다. 손이 주먹으로 쥐어지는 게 느껴졌다.
'사라가 연우를 인질로 잡는다고? 그 로봇이?'
지금껏 이 일을 하면서 이렇게 역겨운 거짓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연우 엄마가 다시 입을 열기 직전, 고원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머니, 저희가 확인한 건 아직 이상 징후 수준입니다. 단정할 수는 없어요. 연우 양이 지금 어디 계신지만 알 수 있다면, 저희가 직접 가서 상태를 먼저 확인하고—"
"고 요원."
2 팀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경고였다.
고원영은 멈추지 않았다.
"확인 후에 문제가 없으면 그냥 돌아오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직접 연락해서 연우 양 목소리를 들어보시는 것도 방법이고요."
연우 엄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는 눈치였다.
"잠깐만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들었다. 연우한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