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26, 2017, 6:52 AM
대부분 호모포비아 사람들의 논리는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동성애 찬성이 있다면 동성애 반대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 둘째는 종교적 이유로 죄악이기에 동성애자들을 계몽과 정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첫 번째 논리는 인권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한다.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하며 사람들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다른 어떠한 가치보다 중요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가치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을 물화시킨 뒤 그에 따른 손해와 이득을 따지고, 공리주의적 최선을 이루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현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인권 또한 공리주의 괴물의 도마 위에 올려버리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인 것에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권 또한 타협하고 협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누군가 나에게 인권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도덕책에 나오는 자유, 평등, 권리와 같은 어려운 단어들은 모두 배제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소한 걸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차별 없이 일자리를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잔디에 누워 별을 셀 수 있는, 누군가에게 태어난 모습으로 나쁜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남자이고, 이성애자인 나는 한 번도 걱정해보지 못한, 그런 아주 기본적인 것.
지금은 당연시되는 이런 ‘인권'이 유린당했던 역사는 우리가 모두 알고 기억하고 있다. 많은 흑인들이, 여성들이 이런 공리주의 괴물의 먹잇감이 되어 왔다. 성 소수자의 인권은 이러한 과거의 흑인 인권, 여성 인권과 맥락을 같이 한다. 타임라인의 그들이 말하는 성 소수자에 대한 접근 방식은 과거 사람들이 흑인과 여성에게 접근했던 방식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과거의 인권유린자들은 백인과 흑인이 사랑하고, 여성이 남성들과 같은 일자리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 정치의 도마 위에 인권을 올려놓았다. 당연하게도 사회적 약자들은 힘을 가질 수 없었고 그들의 인권은 '합법적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두 번째는 논리는 예수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철저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왔던 나 또한 굉장한 호모포비아였고, 이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는 나의 예수에 대한 무지함에서 비롯됐다. 예수의 행보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지금 그들이 보여주는 호모 포비아적 행동들은 예수의 행보에서는 절대 용인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은 Christian과 혼용되어 사용된다. Christian이란 예수의 가르침을 삶의 본보기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수는 약 3년간의 전도 활동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통일, 여성, 생태 등 수많은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그런 예수의 가르침 중 가장 우선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 논쟁의 여지도 없이 단호히 예수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첫 번째 계명을 언급한다.
그들 가운데 율법학자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온 마음으로, 네 온 영혼으로, 네 온 정신으로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마태복음 22장 35-40
예수는 첫 번째 계명으로 신에 대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들의 차원을 넘어선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언급한다. 그 뒤 곧바로 이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감이 이러한 신에 대한 신앙과 동등한, 인간들의 차원인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핵심 가치임을 강조한다. 이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모든 예수의 가르침이 시작되고, 예수가 사회의 약자들을 공감하고 사랑하는 행동의 근거가 된다.
예수가 어울렸던 세리, 창녀, 사마리아인은 당시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마태복음 9장의 “나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왔습니다.”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 예수의 사랑은 사회에서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향해 있었다. 예수가 다녀간 후 2000년 동안 사회가 변하며 인간적 대우를 받지 못하는 계층 또한 다양해졌다. 물질 만능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상대적 빈곤에 허덕이거나 사상과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권을 탄압받는 사람들, 이념과 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자유를 속박받는 사람들 등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힘겨운 삶을 버텨내고 있다. 그중에는 성 소수자들이 존재한다. 성 소수자임을 밝히는 순간 그들의 존재는 정죄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가치는 인간 이하로 강등되어 버린다.
과거 흑인 인권 탄압과 여성 인권 탄압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근거 중 하나가 바로 기독교였다. 기독교인 인권유린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알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가는 약자들에게만 선별적으로 베풀었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우리는 달라야 한다. 아프리카의 기아나 추운 날 떨고 있는 노인은 예수의 사랑이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가 혐오하는 약자에게는 예수의 사랑만이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예수의 사랑은 사회가 사랑하지 못하는, 오히려 그들이 혐오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품어야 한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