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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Aug 06. 2024

우주에서 수영하는 것은 위험해

별로 쓸모 없는 것들의 일기장 

얼마 전 어머니 집에 갔다가 어머니가 나의 백일 사진을, 흑백사진이고 여기저기 낡았고, 왼쪽 아래는 약간 찢긴 사진을, 한쪽에 필기체로 白日(백일)이라고 각인된 그 사진을, 갑자기 냉장고에 붙여 놓으신 것을 발견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사진이지만, 냉장고에 떡, 붙어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날은 아내가 어머니에게 어떤 부탁을 하려고 간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내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셨다, 일을 모두 마친 뒤에, 어머니가 냉장고에 있는 떡과 과일을 가져가라고 하셨다. 냉장고 앞에 섰는데, 내 백일 사진에 자꾸 시선이 갔다. 떡과 과일을 챙기다가 어머니 몰래 사진을 슬그머니 떼어내었다. 집으로 가지고 왔다.      


다이소에는 오천 원짜리 양면 유리 액자가 있다. 이 액자에는 앞뒤 구별이 없다. 나는, 그냥 앞면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내 백일 사진을, 뒷면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딸의 초딩 시절 사진을 한 장 골라 넣었다. 액자를 책상 위에 올려 두니, 근사하고 흐뭇하다. 내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군. 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군.      


아침마다 사진을 바라보니 즐겁다. 어머니는 아들인 나의 백일 사진이 사라진 것을 알고 무척 답답하실지도 모르겠다. 내게 물어보기도 뭐하고, 집 안 구석구석 뒤져도 없을 테니까. 어머니가 전화하시어, 혹시 네가 여기 있던 백일 사진을 가져갔냐? 하고 물으신다면, 예? 뭐라고요, 어머니? 제 사진을 잃어버리셨다고요? 하고 너스레를 떨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직 침묵만 하신다. 아무런 전화도 질문도 없으시다. 내 딸은, 아빠라는 인물이 아빠 자신의 백일 사진을 액자에 넣어 책상에 올려 두고 바라보는 것에 대해 일단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뒷면에 너의 사진이 있어, 하고 딸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여주었다. 딸은 고개를 끄덕끄덕이면서도 눈을 가늘게 떴다. 내심 수상한 눈치다. 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딸 사진을 보는 건 이해가 되어. 아빠들이 흔히 그러니까. 그런데 자기 자신의 백일 사진을 들여다보는 아빠는 도대체 뭐지?      


딸은 아빠가 남과 다른 구석이 있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백일 사진이라니? 이건 도대체 뭔가? 그런 의문의 속삭임이 들렸다. 나 역시, 내가 왜, 나의 백일 사진을 들여다보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볼 때마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SF 영화를 오늘 넷플릭스에서 시청. 물론 예전에 본 영화이다. 어떤 영화는 다시 볼 때 더 재미있다.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고, 영화를 처음 볼 때, 너무 멋진 장면에 흥분해서, 보고도 그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아무튼 오늘 다시 본 영화는 <패신저스>이다. (좋아하는 다른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나오는 제니퍼 로렌스가 등장한다.)      


이 공상과학 영화를 애정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미래의 여러 첨단 장치를 보는 즐거움이다. 가장 그럴듯하게 디자인된 미래의 사물들은 다시 봐도 놀랍고 즐겁다.      


또 다른 이유는 영화 속 딜레마 상황이 무척 흥미롭기 때문이다. 영화 속 우주선은 동면 상태에 있는 5,000명의 승객을 태우고 새로운 행성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중이다. 모든 것이 자동 운항되고 있다. 그 안에서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한다.      


단 한 명의 남자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는 자신 혼자만 깨어난 것이 매우 황당하다고 느끼고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우주선이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90년 정도가 더 남아 있다. 다시 동면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막막한 우주를 자동으로 항해하는 거대한 우주선 속에서, 단지 홀로 깨어난 남자는 광활한 우주 속에 고독하게 던져진 상황을 감내하기 어려워한다.      


그는 동면 상태에 있는 다른 승객들을 바라본다. 문득, 한 여인에게 끌린다. 그녀를 깨우고 싶다. 그런데 그녀를 깨운다는 것은 너무나 큰 범죄이다. 90년 후에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누려야 할 여자이다. 지금 깨운다면 그녀의 삶과 희망은 모두 망가지는 셈이다.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광활한 우주에 자신과 어떤 남자 한 명, 이렇게 단둘이서만 존재하는 삶을 과연 수용할 수 있을까?  남자는 망설인다. 하지만 결국...


영화는 요즘 대두하는 인공지능의 미래를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 미래의 여러 단면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머나먼 우주로의 개척 항해. 완벽한 통제 시스템 하의 우주선. 인간의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1:18:24 지점부터 시작되는 중력 소실이다. 우주선의 수영장은 어둡고 신비로운 우주 공간 한가운데에서 유영하는 느낌을 준다. 갑자기 우주선의 중력 장치가 문제를 일으킨다. 우주선의 전체가 중력을 잃는다. 수영장의 물이 출렁거리며 사방으로 솟구친다. 크고 작은 물방울을 이루며 무중력의 공간을 떠다닌다. 사랑하는 제니퍼 로렌스는 커다란 물방울 하나에 갇혀 발버둥친다. 벗어나지 못한다. 


숨 막히는 장면이다. 오늘 다시 보니, 처음 보았을 때의 그 감흥이 조금 줄었으나, 여전히 놀랍고 흥미로웠다. 왠지 수영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에 돈을 넉넉하게 번다면, 넓은 정원에 맑고 깨끗한 전용 수영장을 하나 만들 것이다. 나 혼자만 쓰는 수영장을. 갑자기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고 중력이 소실된다면 나는 물방울 거품들과 함께 둥실 떠오를 것이다.      


둥실둥실. 숨 막혀.      



우주에서 수영하는 것은 위험하다. 영화 <패신저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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