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있게 살자!
그 시절은 좌측통행 시대였다. 젊은이 K는 어느 날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다가 계단 한가운데에 공익광고 같은 문구가 붙어 있는 걸 보았다. 거기에는 <교양인은 좌측통행>이라고 적혀 있었다. K는 빙긋 웃었다. 그럼, 우측통행하는 미국인이나 독일인은 미개인이란 말인가. 문득 더 흥미로운 게 보였다. 문구 옆에 발자국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신발 자국이 아니라 맨발 자국 그림이라는 거였다. 좌측통행하는 맨발이었다. 도톰한 발바닥과 함께 다섯 개의 동그란 발가락 모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시민의 좌측통행을 유도하기 위한 귀여운 아이디어 같았다. K는 생각했다. 그럼, 교양인은 저렇게 맨발로 다니는 걸까? 다시 웃음이 나왔다. 혼자 농담하고 혼자 웃다니. K는 계속 생각했다. 교양인은 침대에서도 맨발로 뒹굴지. 물론 교양인답게 침대의 왼쪽 공간을 차지하고 누워야 할 거야. K의 아내도 교양인이 되려면 좌측수면을 해야 한다. 그런데 K가 좌측을 차지하면, 아내는 별수 없이 우측수면을 하게 된다. 아내가 좌측을 차지하면, K가 교양 없게 우측수면을 해야 한다. 서로 교양인이 되기 위해선 서로의 발끝을 바라보며 누워야 하는 것이다! 그건 괜찮은 침대 사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발을 끌어안고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K는 그것을 ‘좌측수면’이라고 촌스럽게 말하기보단 <69형 침대 사용법>이라고 하는 게 더 신비로울 것 같았다. 소설가 이상(李箱)이 운영했던 다방 이름도 신비한 <69>였다고 한다. 다방의 간판 바탕은 검은색이었고 69라는 숫자는 선명한 살색이었다고.1) 애석하게도 K와 아내는 69형 침대 사용법을 실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 아내를 설득하여 교양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K는 생각했다. 교양 있는 수면은 건강에도 좋을 게 분명했다. K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좌측 퇴근길을 재촉했다.2) 3) 4)
1) 이상의 커피숍 이름이 <69>가 아니라 <식스나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1930년대 일제 당국에 의해 허가가 났다가 그 뜻을 알아차린 후에 취소당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고.
https://www.mk.co.kr/news/culture/10956723
나는 중딩 시절인지 고딩 시절인지 아무튼 어느 남자 국어 선생님에게 소설가 이상의 다방 <69>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69는 남녀 성체위의 하나를 의미하는 은어인데, 다방 간판마저 검은색 배경에 살색으로 숫자가 무척 선명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마치 간판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그걸 목격할 연세는 아니었고, 아마 윗세대에게 전해 들은 것 같다. 선생님은 심청전이나 춘향전의 한 장면도 생생한 목격담처럼 설명하시던 분이었다. 그 시절에는 학급에 남자아이들만 있었기에 중딩이든 고딩이든 선생님들이 약간 낯 뜨거운 음담도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교실에서 푼다면 (아마 8시 뉴스에 교양 없고 자질 부족한 교사로 나오고) 결국 교직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겠다.
2) 어느 날 나는 아침에 급하게 지하철 역사로 달려갔다. 급히 달려간 이유는 당연히 급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평소처럼 내려가는 방향의 에스컬레이터에 성큼 올라탔다. 좌측으로 탔는데, 항상 좌측으로 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이 우측통행 변경 첫날이었다. TV도 안 보고 바쁘게 살던 나는 전혀 몰랐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그토록 당황한 적이 없었다. 젠장, 에스컬레이터가 마구 올라오고 있었다. 내려가려는 의도와는 달리 몸이 허둥지둥 뒤로 움직여서 황당했다. 나는 그날의 전복적인 경험을 단편소설의 한 장면에 가져다 썼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보냈는데, 전혀 눈길을 끌지 못하여 당선 소식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 뒤로 대략 일 년 동안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 때마다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시대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 실패한 그 소설이 컴퓨터 폴더 한 구석에 남아 있길래, 다시 읽어 보니 참으로 횡설수설하긴 했다. ㅎ
3) 좌측통행이 우측통행으로 변경된 것을 두고 보수 우파의 정치적 음모가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친 견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원래 우측을 선호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좌측통행 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보행에서는 좌측통행을 권장했고 횡단보도에서는 우측통행이 원칙이었다. 한 마디로 혼란스러운 시대였던 것이다. 원래 인간은 우측보행이 더 자연스럽다고 한다. 영국과 일본 등 좌측통행이 일반적인 나라도 있지만 우측통행을 권장하는 나라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국제적 기준에 따라가기 위해 우리나라도 우측통행으로 통일한 것은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좌측이냐 우측이냐에 따라 건물을 설계하거나 할 때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일본이 불편하게 좌측통행하게 된 것은 사무라이들이 칼을 좌측에 차고 다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우측통행하면 서로 지나치는 사무라이들의 칼집이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고. 그러면 시비가 붙을 수 있기에 좌측통행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썰(?)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우리나라가 원래 우측통행이었던 이유는 뭘까? 우리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 공자님과 맹자님의 책을 공손하게 오른손으로 들고 다니는 문화였기에 우측통행하는 게 매우 자연스러운 문화이지 않았을까, 하고 나는 감히 새롭게 주장하는 바이다. ㅎㅎㅎ
4) 이제는 우측통행 시대이다. 질서를 지키는 교양인이라면 당연히 우측통행하는 게 옳다. 문제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변해도 교양 있는 부부가 되려면 여전히 <69형 침대 사용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사회적으로 좌측이냐 우측이냐는 하는 것은 부부의 교양 있는 침대 사용법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깊은 통찰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