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잠꼬대
삶이 부질없는 뜬소문처럼 느껴지는 날에는 음악을 듣지 않으며 책을 읽지도 않는다. 심심풀이 땅콩 삼아 이따금 풀어보는 수학의 정석 문제도 철 지난 공모전 안내처럼 무의미해 보인다. 이런 날에는 그저 조용한 거실의 조용한 소파에 앉아 조용한 창밖 세상을 조용히 내다보는 것이 전부다. 밖은 이제 보니, 내게만 뜨거운 적이 없던 여름은 가고, 가을 햇살이 오고, 어디선가 바람도 부나 보다. 바람이 여기 거실까지 불어오면 좋겠다. 닫혀있는 베란다의 창(窓)과 벽을 통과해 내 볼을 스치면 좋겠다. 그런 초현실적인 바람은 왜 없는 것일까. 눈을 감고 상상한다. 뺨에 스치는 바람의 손길을 느껴본다. 바람의 손길이 나의 두개골을 천천히 감싼다.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어루만진다. 디지털 세상에 시달리는 내 뉴런 세포를 달래준다. 모니터에서 뭔가를 쓸 때 글자체 선택 때문에 머뭇거릴 때가 있다. 스크리브너에는 함초롱바탕이 없다. HY신명조를 심어 두고 그걸 쓴다. 사실 나는 함초롱바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세련된 글자체인데 왜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래아 한글에서는 휴먼명조를 주로 선택했다. 사실 어떤 글자체이든 A4 용지에 인쇄하면, 그게 그거다.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딱히 더 좋아 보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서는 민감해진다.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자꾸 집착하게 되는 걸까. 역시 잘 모르겠다. 마음의 벽을 거침없이 통과해 불어오는 뮤즈의 손길, 그런 다다이즘 요정 같은 뮤즈는 내게 오지 않는 것이다. 문득, 뺨을 스치는 뮤즈의 손길을 느낀다. 손길이 천천히 내 머리를 감싼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어루만진다. 눈을 뜬다. 알고 보니…… 뮤즈의 손길이 아니다. 나의 두 손이다. 에혀, 뮤즈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해적 요정이라도 와주면 반가울 것 같다. 삶은 원래 부질없는 뜬소문이라고, 다 아는 사실 속삭여 줘도 괜찮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적당히 나이를 먹고부터는 나이 먹은 사람들이나 하는 따분한 말장난이나 하는 사람이지, 나이를 먹고도 불장난이나 하는 사람이나 하는 짓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어쨌든 삶의 열정이나 애정이나 뭐 그런 것이나 저런 것이나 모두 잃어버린 지는 꽤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외출한다고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가 밤에만 걸어 다닌다고 믿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한심하다. 그건 20세기 사고방식이요, 지금은 이십 일 세기란 말이오, 하고 약간 꼰대스러운 표정으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