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담자였던 내가 제 발로 성당에 찾아가 구지 한국의 마지막 주소지에 있던 나와 아이의 교적을 동네에 있는 한인성당으로 옮겼다. 그것도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미리 신청한 사람만 주일 미사를 참여할 수 있는 제한된 활동을 하던 시기에 말이다.
나는 신앙심이 많은 신자는 아니다. 아예 없다고 해도 무관할 수 있다. 엄마가 가톨릭 신자였고, 외갓집과 친할머니도 성당을 다니셨기에 엄마의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했다. 그 다음해 첫 번째 연미사를 드리며 엄마를 위해 세례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례를 받은 목적때문인지 성당을 가는 내 마음 한 구석은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성당을 다녀온 다음에는 그리운 엄마 밥을 먹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든 마음을 위로 받는 것처럼 평화로워지는 이상한 마법이 있다. 때로는 신부님 말씀이나 그날의 강독이 나에게 울림을 주는 경우도 있다.
캐나다에 와서 현지 성당을 몇 번 갔다. 미사를 드리는 순서는 전세계적으로 같기 때문에 눈치껏 따라갈 수 있었지만 신부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혼자 있었던 4개월동안은 주말에 종종 갔었는데, 가족들이 캐나다에 오고 나서는 좀체 발길이 향하진 않았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학교 수업을 들으며 아이를 온전히 내가 돌봐야 한다는 압박감과 코로나로 인해 제한된 생활을 해서인지 자주 아이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을 퍼붓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별일이 아니고 4세 아이는 원래 그러기 마련인 일들이었다. 아침에 등교준비를 하는 와중에 너무 꼼지락거려 스쿨버스를 놓칠 듯 말 듯 서둘러 나가야 하거나, 잘 시간이라 놀이감을 정리하자고 하는데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 학교에서 마스크를 잘 쓰고 있기로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된 따위으 일이었다.
마법의 주말 미사는 나로 하여금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했고, 뭐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주어 아이를 조금 더 천천히 기다려줄 마음을 주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낭만이 실현되었지만 휴일이라 재설작업을 일찍 하지 않아 차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눈을 헤치며 성당을 찾았다. 처음에는 한 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조금은 지루해하기도 했던 아이도 점점 익숙해져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성당을 다녀오는 것이 루틴이 되었고 그 루틴으로부터 약간의 평화를 얻었다.
21년 엄마의 연미사를 드리던 날 미사 말씀은 용서에 관한 것이었다. 용서라는 게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괴로운 내 마음을 떨쳐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부재이후 할머니를 많이 미워했다. 할머니도 이미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엄마를 그리워할 때면 순간순간 할머니를 미워했다. 그 시절 많은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가 그러했듯, 엄마를 탐탁치 않아했던 할머니, 결혼한 이후 힘든 시집살이를 하다가 결국 행복하지 못한 마음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도 엄마를 그리워 하는 것조차 할머니 눈치를 보게 만들었던 불편함. 그 뾰족한 내 마음의 칼날은 늘 할머니에게 향했다. 아들이 없어 영원히 시어머니가 될 수 없는 나는, 앞으로도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볼 날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고요함이 찾아올 수 있다면 이제는 혼자만 아팠던 시간들을 놓아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은 날이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없어도 현재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구원을 주니 성당은 앞으로도 나만의 특별한 장소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