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날 때 목적지를 정한 뒤 정해진 여정이 있는 패키지여행과 취향에 따라 일정을 정할 수 있는 자유여행 중에 선택해야 한다. 패키지여행은 가고자 하는 곳을 빠르고 편안하게 데려다주는 전용 버스와 식사 시간 때마다 어느 음식점을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데려다주는 가이드가 있지만 방문지의 볼거리가 기대에 미치지 않거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그 여행은 아쉬운 기억으로 남곤 한다. 자유여행은 비행기를 내리는 순간부터 어디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 숙소로 이동을 해야 할지부터 난관이 되기도 하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그 모든 길이 경험이고 추억이 된다.
아빠와 단 둘이 해외여행을 두 번 갔었는데, 한 번은 고등학생 때 패키지여행으로 홍콩을 갔고, 한 번은 결혼하기 전 자유여행으로 후쿠오카를 다녀왔다. 물론 시간적으로 후쿠오카 여행이 비교적 더 최근이긴 하다. 그래도 벌써 12년 전이지만. 홍콩 여행은 가이드가 데려갔던 보석과 건강식품을 많이 팔던 상점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이고, 왜 홍콩의 귀신이 강시인지 설명해 줬던 것만 생생하다. 반면 후쿠오카 여행은 저녁 바람을 맞으며 포장마차가 즐비한 강가를 걷다가 일어도 못하면서 용기 있게 포장마차에서 이것저것 사 먹었던 우리, 평소 부녀간의 대화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편인데 버스를 타고 오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따뜻함이 아직도 마음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캐나다에 와서 8개월 가까이 이곳의 삶은 자유여행이었다. 버스를 타고 앉자마자 졸아버린 탓이 한참 뒤에야 내가 가고자 했던 곳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 알게 되었고,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최대한 가까운 정거장에 내려 한참을 걸어간 적도 있다. 집으로 돌아와 지친 하루를 되새기며 다리를 주물렀고 약속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오는 사람보다 한 시간은 일찍 집을 나섰다. 그 시간들이 힘듦보다는, 자유 여행 중에 만난 예기치 못한 이벤트였으며 그날을 추억할 수 있는 즐거운 에피소드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 보험료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생활비를 줄이고자 했던 목적이 제일 크긴 했지만, 차를 사지 않았던 나는 런던에 온 여행자처럼 빠름보다는 자유여행을 하면서 생길 수 있는 사사로운 추억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지냈었다. (런던은 완전 시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큰 도시도 아니다. 대중교통은 버스 밖에 없고, 버스의 배차 간격이 매우 길다. 그리고 도시를 촘촘히 운행하지 않아 가까운 거리도 꽤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충동적으로 차를 샀다. 한 학기를 무사히 마쳤다는 뿌듯함으로 다녀온 뉴욕 여행 이후, 남편과 우리의 거처 문제에 대해 며칠간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아이쇼핑을 하러 나가서 얼마 비싸지 않은데 딱 내 취향이기까지 한 옷 한 벌을 사듯 아주 쉽게 차를 구매했었다. 편해졌다. 그전에 불편과 편함의 비교대조군이 없어서 몰랐구나 싶을 정도로 차가 있어서 편하다고 생각했다. 슈퍼에서 물건을 마음껏 사도 집에 돌아가는 길이 걱정되지 않았고, 학교 실습 시간에 필요한 물건을 집에 두고 온 날에도 남편에게 얼른 가져 다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친구 집에 가서도 버스 막차 시간 걱정 없이 놀았다.
나는 점점 차를 타고 목적지만 빨리 다니게 되었다. 차가 없을 때는 슈퍼에 가는 매우 평범한 일상에서도 버스를 기다리며 본 어떤 사람, 그 사람의 특이한 행동, 실수로 한 정거 먼저 내려서 맡게 된 꽃나무의 강렬한 향기,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추억저장소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 차라는 매개체는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하루가 끝날 무렵 그날 있었던 흥미로웠던 일이나 기억하고 싶은 일을 간단히 메모해 놓는 습관이 있다. 예전에는 매일 그곳을 빽빽이 채웠다. 차를 타고 다닌 뒤로는 별다른 약속이 없는 날에는 적을 것이 없었다. 빈칸 혹은 단어 하나만 남겨지는 날짜들이 늘어났다. 추억이 반토막 났다.
20대 후반 가깝게 지냈던 S는 어느 동네에 어떤 음식점이 맛있다는 소문이 있으면 종이에 지도를 그려왔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실시간으로 켜고 길을 찾아다니는 시기는 아니었다. 뭔가 묘하게 지도가 부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S는 그 지도를 보고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들어섰다. 자주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경우가 생겼다. 같이 길을 찾아볼 요량으로 그 지도를 살펴보면, 눈앞에 실제 있는 길 하나가 지도에 없거나 그려 온 지도의 건물 위치가 실제 도로에 있는 것과 매치가 되지 않고는 했다. 결국 그냥 잠자코 따라가면 가고자 했던 곳에 다다랐다. 그리고 길을 찾는 사이 종이 지도에는 없던 어떤 지점을 기웃거리며 나눈 추억들이 낭만이 되었다. 요즘은 어디 뭐가 맛있다더라 해서 찾아가면 그래서 거기가 정말 누구의 입맛에나 맞는 맛집이었는지, 입소문에 비해 그냥 그런 곳이었는지만 기억에 남는다. 서비스나 음식이 매력적이지 않았던 곳은 아예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 그 시절에는 음식이 정말 맛있는지 맛이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음식점에 갔던 목적이 다른 건 아니었을까. 과거 그때의 우리는 맛있는 음식점은 수단이었을 뿐 우리 곁의 사람들과 그곳에 가는 여정을 즐겼던 것은 아닐까 싶다.
백 미터 앞 공사 현장까지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은 참 편리하다. 내가 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서 길이 막히면 실시간으로 도로 상황을 확인해서 더 빠른 길을 안내해 주는 위성 시스템은 불필요한 시간을 도로에서 낭비하지 않게 해 주어 효율적이기도 하지만 가끔은 S의 엉뚱한 지도가 그립다.
일상은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여행은 오늘 시간이 된다면 하고 싶은 게 있다. 회사 목표가 내 삶의 목표가 되어 링 위에 올라가 매 경기 미션 클리어를 해야만 했던 곳에서 벗어났다. 내가 오늘 슈퍼에 가서 장을 보려고 했던 물품을 모두 집에 갖고 오지 못한다고 해서 책임을 져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없다. 내일 아이가 학교 간 사이 낮잠을 늘어지게 잔다고 해서 나의 자질을 논할 사람도 없다. 일상이 여행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목적지에 갈 수 있는 빠른 길을 안내해 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끄고 자동차는 주차장에 세워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나서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