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은 넘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

by Elin

삶은 끊임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오늘 점심 메뉴는 무엇을 할지부터 외출할 때 어떤 옷을 입을지까지, 아주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것은 선택의 결과가 아주 길게 영향을 미치지 않아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결정을 해도 부담이 없다. 삶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선택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하는데, 때로는 그런 순간에도 즉흥성이 앞서기도 했다. 선택한 길의 방향이 기대와 다르더라도 후회나 회피대신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책임이라는 것이 반드시 선택한 것만을 끝까지 어설프게 움켜쥐고 있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몇 달 후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소심하고 주체가 없던 어린이였다. 엄마의 바람대로 사립초등학교에 추첨되어 오빠와 나란히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과 나는 뭔가 동떨어져 보였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뭐든지 잘하는 게 많은 것 같은 아이들 속에서 나는 뭔가 할 줄 아는 게 없는, 특징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눈이 급속도로 나빠져 굉장히 두꺼운 안경을 썼다. 그 안경은 내 눈을 바라보는 사람마저 빙글빙글 돌 것 같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4학년 무렵부터는 교정도 시작했다. 뱅글뱅글 도는 안경을 쓰고 이에 철도 박고 돌아다니는 아이의 이름마저 놀리기 제격이니 자주 남자애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실제로 내가 안경을 쓰고 교정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찍은 사진은 별로 없으며 그나마 있는 사진 속 나는 우울해 보인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가 사진을 찍을 때면 보이는 개구진 표정과 비교하면 나는 즐겁지 않은 어린이였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놓였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여중이었고, 아무도 외모로 나를 놀리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숨이 쉬어졌다. 교정이 끝나고 렌즈를 끼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붙어있지 않다는 점은 나를 편안하게 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친구들은 서로 조금 다른 준비를 시작했다. 특목고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고, 상업고를 가고 싶어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런 특수목적고등학교 진학이 아니라면 주소지에 따라 배정받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엄마는 내가 종로구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길 원했다. 배화여고, 이대부고 등의 몇 학교는 지원을 해서 갈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바람직한 수험생이 되어 네임벨류가 있는 대학의 의대와 같이 모두가 선망하는 과에 가길 원했다. 엄마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그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미래였다. 나는 내가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런 삶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우연한 계기로 응모했던, 교보문고에서 개최한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다. 그 상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교장선생님에게 받으며 이전에는 몰랐던 뿌듯함을 느꼈다. 교내 백일장에 낸 글을 국어 선생님께서 재밌다고 했을 때, 그동안 딱히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한 나의 재능은 이거였나 싶었다. 스스로의 만족감을 느끼면서 조금은 소심했던 마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침 교내 게시판에 안양예술고등학교 입학 안내문이 붙었고, 그곳에 문예창작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동네 고등학교가 아니라 또다시 어딘가를 선택해서 간다면 엄마가 원하는 곳이 아닌 내가 선택한 곳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학교가 어느 지역에 있는 것인지, 정확히 거기서 뭘 배우는지 몰랐지만 말이다. 자주 엄마 뒤로 숨었으며 때로는 엄마의 입을 통해 내 의사를 표현했던 마마걸이었던 내가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걸 표현하고 독립성을 갖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 내가 그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 학교 생활을 즐겼느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소심했고,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방송반 활동을 시작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망치듯 그만두었고, 학교 생활은 점점 나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상상했던 고등학교 생활과는 달랐다.


3학년을 앞둔 봄방학에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분명 어릴 적 사진 속 나는 아빠와 허물없이 지내고 있는데, 기억 속엔 아빠와 한 순간도 가까웠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 대신 아빠와 소통하는 데서 어떤 편안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지도 못했다. 부딪히며 성장하기보다는 회피하거나, 감정을 앞세우거나, 아무도 닿지 못할 곳으로 숨어버렸다. 엄마의 뒤에 숨지 않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책, 나는 그렇게 나이만 계속 먹었다.


캐나다에서 영주권을 향해 갈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방법은 2년제 컬리지를 졸업하고 PGWP라는 워크 퍼밋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었다. 유학원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유아교육을 많이 추천했지만, 나는 자신이 없었다. 대신 웹디자인과 베이킹에 관심이 있었다. 한국에서 일하며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다뤘고, 웹페이지를 수정하며 무언가를 만들어 업로드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베이킹 역시 취미로 시작했지만, 직접 만든 것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선물이 된다는 점이 좋았다.


웹디자인은 포트폴리오가 필요하다는 말에 더 알아보지 않고 베이킹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나중에서야 내가 생각했던 프로그램에는 포트폴리오가 필요 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이미 선택은 끝난 뒤였다. 학기가 시작한 지 며칠 만에 꺠달았다. 베이킹은 나에게 취미로 남았어야 했다는 걸. 이미 경험이 있거나, 실수에도 개의치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또다시 움츠러들었다. 비교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이제는 안다.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다시 선택하는 것 또한 책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안 채로도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기도 한다. 더 나은 선택을 하기보다는, 이 상태로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게 얼마나 비겁한지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미래의 나에게 책임을 미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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