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혼자 해외에서 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봐야 고작 4개월뿐이고 영어 수업을 듣기 위해 먼저 온 것이었다. 이십 대 때도 해보지 못한 유학을 서른이 넘어서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설렜다. 남편은 출퇴근 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데려와야 하는 생활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부가 함께 해도 회사의 눈치를 보느냐 쉽지 않다는 그것을, 주변에 급하게 아이를 맡길 가족이 없는 남편이 혼자 그렇게 몇 달을 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테다. 다소 죄책감이 들기도 했지만 나에게도 캐나다에서 가족이 오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지낼 집을 찾아야 했고 해운이사로 보낸 짐을 받아 정리해야 했다. 아이의 방을 제대로 갖춰놓아 8월 말에 입국하면 바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하기로 했다. 그래도 혼자라는 여유를 조금은 만끽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기억 속의 나는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윤선생이라고 하는 영어 학습지를 했다. 엄마의 바람대로 입학했던 사립 초등학교는 1990년대에는 흔하지 않게 영어도 정규 교육 과목이었다. 그 당시 학원도 다녔다. 그때 분명히 나는 학원 선생님이 쪽지 시험을 본다고 한 단어를 어렵지 않게 외워 막힘 없이 시험 시간에 적어 나갔다. 항상 나보다 낮은 점수를 받았던 이웃 학교의 남학생들로부터 커닝을 했다는 근거 없는 오해와 질투를 받기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뛰어나진 않아도 뒤쳐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영어 실력이 바닥을 치기 시작한 건.
본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아이엘츠 아카데믹 시험에서 6.5 이상의 점수나 컬리지에 있는 어학 과정의 레벨 8까지 수료해야 했다. 어학 과정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천천히 단계를 쌓아갈 여유가 없었다. 서른이 넘어 Be동사와 일반 동사의 차이도 선명하지 않았던 실력으로 아이엘츠 6.5를 단기간에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컬리지에 바로 입학할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공인영어 시험의 점수가 있으면 학교에서 진행하는 테스트를 보지 않고 그 시험결과와 비슷하다고 정해놓은 레벨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학교의 테스트는 캐나다에 도착해서 보기 때문에 미리 내가 어느 레벨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최소한의 비용만 어학 과정에 지출하고 싶었기에 아이엘츠 시험을 보고 제출했다. 시험 맞춤형 한국 학원의 집중 훈련 덕분에 받은 영어 성적으로 들어간 어학 과정 레벨은 실제 내 수준보다 높았다.
현실과 로망은 달랐다. 외국 생활을 그려보면서 은근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로망들이 있었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나. 도시락을 싸 들고 눈을 돌리면 사방에 있는 공원에 가 느긋한 오후를 보내는 하루. 외국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멋지게 조깅을 해 보는 것은 로망에 불과했다. 4개월 안에 무사히 어학 과정을 마치고 가족들이 들어오는 시기에 문제없이 본과에 입학하기 위해 영어 공부를 새벽 두 세시까지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막힘없이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 해 여름을 보내며 남편에게 캐나다의 여름은 하나도 덥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다음에 느낀 여름은 햇살이 무척 뜨겁고 더웠다. 19년 여름은 시원한 버스를 타고 서늘할 만큼 에어컨을 켜 둔 학교만 오가며 집 안 조그마한 책상 앞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캐나다 여름의 실체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어학 과정을 듣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처럼 캐나다에 이제 막 온 사람들이었다. 아직 캐나다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많았다. 여느 때처럼 수업 중간에 밥을 함께 먹으며 잡담을 나누다 다운타운 빅토리아공원에서 열리는 선페스트 축제에 수업이 끝난 후 함께 가보자고 했다. 푸드 트럭이 줄지어 서 다양한 나라의 특징 있는 요리들을 선보였다. 탐나는 골동품, 이색적인 디자인 상품, 다른 나라의 전통 의상,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실버 액세서리까지 갖가지 아이템들이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캠핑 의자, 잔디밭,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아 푸드트럭에서 서로 사 온 음식을 나눠 먹었다. 캐나다에 온 지 두 달 만에야, 외국 생활을 생각하면 막연히 떠오르는 부러운 장면 속에 드디어 들어온 셈이었다. 그런데 예보에 없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라면 우산이 있어도 종종걸음으로 실내를 찾았을 것이고 억센 비라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습관처럼 '비 온다, 비 많이 오네, 쉽게 안 그치겠다, 집에 가야겠다'가 머릿속에 댕댕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았다. 더 거세지는 비를 맞으며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내가 캐나다에 있구나라는 걸, 캐나다에 도착하고 나서 제일 현실감 있게 느꼈다. 비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은 내 로망 리스트에 없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각자만의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나라를 떠났던 마음을, 특별한 언어 없이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서로 토닥여 주었던 것 같다. 수업 교재는 젖든 말든 상관없이 혹시 휴대폰이 망가질까 봐 누군가 갖고 있던 비닐에 모두의 휴대폰을 모으면서, 이 순간을 시간이 지나도 잊지 못할 각자만의 색깔로 마음에 담고 있었다. 그로부터 7년 여가 지났지만, 19년의 여름을 생각하면 빗 속의 우리들이 아직도 반짝반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