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된다고 해도, 닮지 않기를

by Elin

4개월 동안 들었던 어학 과정 중 마지막 단계에 한국인의 비율이 제일 높았다. 본과에 입학해서도 나 포함 한국인이 7명이나 되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 아는 한국인의 수가 자연스레 늘어났다. 희한하게 비슷한 또래보다는, 대부분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었다. 가족과 지낼 아파트를 구하기 전에 함께 지냈던, 한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왔다던 룸메이트나 어학 과정 중에 만났던 이십 대 초반의 친구들과도 한동안 만났었지만 아무래도 나처럼 가족 구성원이 있는 언니들과 연락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 비슷한 나이대여야 친구가 되는 게 당연했던 것에 비해 캐나다에서 나이는 친구가 되는 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친구라기보다는 타지에서 같은 말을 쓰는 공동체 의식에 의해 가까워진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를 둔 엄마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언니들의 어떤 고민들과 자녀의 친구를 대하는 모습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내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후반까지 알던 어떤 친구들의 엄마. '엄마'라는 단어를 앞세워 나에게 했던 말들과 그 말을 옮기는 친구가 싫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생각했고 도대체 왜 내 마음이 삐뚫었는지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니 이유가 없진 않았었다. 엄마가 없는 나에게 엄마가 있어 유세를 떠는 건가 싶었던 마음이었다. 더구나 나는 때때로 엄마의 그림자에 자주 숨던 아이였으니까. 그들은 기억조차 하지 않을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말들이 나에게 꽤 비수로 꽂혔다. 그 말들이 비스가 된 이유는, 나에게는 이제 저렇게 말해 줄 엄마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엄마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어린 꼬맹이는 아니었지만 엄마 뒤에 숨고 싶던 내게 세상이 사라진 그런 느낌이었다. 마흔이 넘은 현재도 미완성이기에 그때는 더더욱 여전히 자라다만 마음이었다.


언니들은 때로 그 당시 내 친구의 엄마 대변자가 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같이 공부하는 친구로 만나 언니들의 생각을 충분히 들어서 그런지 부모로서 걱정되는 부분과 언니들의 입장이 공감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아이의 미래라는 것을 앞세워 내 아이의 반대편 입장에 있는 다른 아이에게 내 기준의 잣대를 내세울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선을 긋게 되었다. 아직은 내 아이가 웬만하면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어린 나이여서 그런 걸까.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 딸과 딸의 친구들 관계에서 발생할 일들보다 내가 다른 엄마들에게 받았던 상처가 더 예민한 철이 덜 든 엄마라서 그런 걸까. 나도 언니들의 나이가 되면, 나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었던 '엄마'라는 단어를 내세워 다른 아이들을 판단하게 될까. 그 당시 내가 듣기 싫었던 모든 말들은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이해하는 날이 올까.


엄마가 뇌출혈로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는 현실감이 없었고, 엄마라는 흔하고 만만한 단어가 금기어가 된 것처럼 그냥 외면하기도 했었다. 어떤 순간에는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는 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었는지. 내가 엄마라는 방패 뒤에 숨고 싶을 때 왜 내 옆에 없는지. 나에게 의미 있는 날 왜 내 옆에서 더 좋아해 주지 않는지. 졸업식 날 외할머니가 갖고 온 꽃다발은 충분히 예뻤지만, 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친구들을 힐끗거렸고, 여대생이 되어서는 엄마와 함께 쇼핑을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했었다.


내 나이 앞 숫자가 4로 바뀌고 나서야 엄마는 그때 너무 젊었었구나, 엄마도 아직 하고 싶었던 게, 할 수 있었던 게 너무 많았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의 엄마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사십 대였고 젊고 젊은 한 사람의 삶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쏜 화살은 어떤 경로로든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는 말로 위안 삼던 밤이 있었다. 내 입장도 언젠가 바뀔 수 있다. 아이가 성장하는 속도에 맞춰 지금도 이미 바뀌고 일을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었던 어른들의 마음을 백 번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 시절의 내가 아팠던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해가 변명이 되지 않기를, 내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다. 나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나도 똑같은 행동과 말을 누군가에게 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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