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점의 착각과 근무평가의 의미
우리 회사는 반기마다 근무평가가 이뤄진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리고 그 일들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어필하기 위한 보고자료를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사들의 평가점수가 부여된다. 처음 근무평가 보고자료를 작성해야 했을 때는 어떤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팀장님께서 샘플을 공유해 주셨다. 부서 차원에서는 과업의 유형을 분류해, 내가 작성하려는 업무가 어느 항목에 해당되는지 참고할 수 있는 자료도 함께 나눠주셨다.
직속상사인 팀장님은 내가 6개월 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 위의 상사분들까지는 세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치 자기소개서를 쓰듯이 보고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만, 너무 과장되어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신입 직원으로서 ‘꽤 괜찮게 일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이 어떤 방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지, 그리고 근무평가 점수를 잘 받는 선배들의 사례를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오로지 사실에 근거한 나만의 방식으로 내용을 채워갔다.
그렇게 처음 받은 점수는 96점이었다. 만점이 몇 점인지는 들은 적이 없었기에, 처음 점수를 보고는 속으로 내적 환호를 질렀다. “내가 꽤 일을 잘했구나.” 당연히 만점이 100점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점수를 알지 못했고, 특히 나와 비슷한 시기의 동기들이 어떤 점수를 받았는지도 몰랐기에, 한동안 혼자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와의 식사 자리에서 현실을 깨달았다. 대놓고 점수를 말하기는 민망해서 넌지시 물었다.
“선배님, 이번에 점수를 처음 받아봤는데 생각보다 괜찮게 나온 것 같아요. 혹시 근무평가 점수 만점이 100점인가요?”
내 밑밥 깔린 말을 들은 선배는 “오, 점수가 괜찮게 나왔어요?”라고 웃으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선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직접적인 점수는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나쁘지 않다’고 하면서 100점 만점이냐고 묻는 순간 이미 내 점수대를 짐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선배는 확실히 말했다.
“만점이 100점은 아니야.”
그때는 정확한 만점 점수를 듣지는 못했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만점은 140점이다. 즉, 나는 ‘좋게 봐도 평균 정도’였던 셈이다. 순간 머쓱해지면서, 신입으로서 꽤 인정받았다고 스스로 도취되어 있던 마음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도 ‘평균 이하가 아니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 후로 근무평가를 반복하며, 나는 주요 업무가 마무리될 때마다 미리 평가 보고자료에 업무성과를 기록해 두었다. 하지만 내가 ‘이 조직에서 꽤 괜찮은 인력’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지금까지 받은 최고점은 104점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위치에 대한 겸손이 생겼고, 동시에 점수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 설명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처음에는 단순히 ‘숫자’에 집착했지만, 점차 ‘무엇을 잘했고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고 싶어졌다.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평가 면담을 요청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연차가 쌓여도 점수가 꾸준히 오르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우울해졌다. 동기들과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회사가 아직 연공서열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구조라는 말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연차가 더 쌓이면 점수가 올라가겠지’ 싶으면서도, 단순히 연차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점수를 잘 받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평가 프로세스 속에서 나온 이 점수가, 내 회사생활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근무평가 점수에 불만을 가진 동기들의 퇴사를 보며 의문이 들었다.
“왜 이 시스템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을까?”
“왜 구체적인 피드백은 주지 않을까?”
물론 평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수많은 인원이 각기 다른 업무와 성과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성해 내니, 일일이 피드백을 주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특히 우리 부서처럼 주어진 업무와 외부 요인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는 경우라면, 평가의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책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평가자의 위치라면, 누군가가 내 점수에 의문을 가진다면 그 근거를 당당히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또 긍정적인 피드백과 함께 개선점을 공유하며 구성원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나에 대해 느끼는 ‘상향평가’에도 귀 기울이는 리더가 되고 싶다.
물론 한 사람의 피드백이 개인의 총점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점수 그 자체보다, “당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 “당신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런 ‘마음이 담긴 평가’를 원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았다면 이런 고민을 했을까 싶다. 아마 처음 한두 번은 마냥 기뻤겠지만, 세 번째부터는 점수 그 이상의 의미를 알고 싶어 졌을 것 같다.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근무평가 점수에 일희일비하던 시절을 지나 ‘점수를 아예 확인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근무평가 점수는 연봉상승률을 결정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게 당신의 회사생활이나 실력을 보여주는 건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앞으로 내가 이직을 하게 되더라도, 그 이유는 평가점수 때문이 아니라 내 커리어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선택, 그리고 현재 회사에서 충분히 많은 것을 배웠다는 확신 때문이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평가점수를 잘 받기 위해 고심하며 작성했던 업무성과 보고자료들은 지금 내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작성할 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결국 회사가 6개월마다 나의 업무성과를 정리하도록 ‘강제’한 이 시스템에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점수의 높고 낮음에 따라 내 회사생활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을 기록하며 그것들을 실현해 나가는 것 —그저 묵묵히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마무리해 본다.
여러분들은 회사에서 처음 받은 근무평가 점수가 어땠는지, 그리고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궁금해진다.
이안 영 Ian Young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