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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hyun Sep 07. 2018

버스 안, 주교님을 만나다

강우일 주교님

오늘 낮 제주여상에서 351번 버스를 타고 시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마침 자리가 비어 뒤쪽에 앉을 수 있었다. 버스가 중간 지점 어딘가를 지날 무렵, 앞문을 통해 버스에 오르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제주교구 교구장이신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이었다. 주교님이 버스를 타고 다니신다니...!

 

회색과 하늘색이 섞인, 그닥 도드라 보이지도 않는 소박한 여름 사제복을 입으신 주교님은 앞에 앉으실 듯하더니 앞자리를 비워 두고는 뒤까지 걸어와 내 앞 자리에 앉으셨다. 놀라고 당황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주교님께 인사를 드렸다. 주교님도 나에게 인사를 해주셨는데-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추측이지만-짧은 손짓과 몸동작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소란스럽게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이것저것 묻듯, '천주교 신자이냐, 어느 성당 다니냐?' 이런 말씀도 없이 조용히 앞을 보며 앉아 계셨다. 어딘가 쉬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나도 아무 말 없이 주교님을 지켜보다가 내리기 전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렸다. 가시던 길 조심히 가시라고... 주교님도 살펴 가라며 답해 주셨고, 내 손목에 끼운 묵주 팔찌를 조용히 쳐다보셨다.


한 교구를 총괄하는 주교님쯤 되면 검정색 세단을 타고 다니고 운전기사도 딸려 있고 어딜 가든 동행하는 수행비서 같은 사람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추측했었다. 그런데 일흔이 넘은 주교님이 홀로 버스를 타고 다니시는 모습을 목격하니 감동이 밀려왔다. 무료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평범한 '노인'이 되어 가만히 버스 안에 앉아 계신 주교님은 그 뒷모습 자체로 감동이었다. 오늘 낮 최고 기온이 31도였는데...


평소 버스를 선호하기는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자가용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구질구질, 바득바득 버스를 고집하는 건 아닌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 같은 것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버스를 이용하는 주교님을 직접 뵈니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버스 애용자'로서의 자부심이 생겼다. 나는 주교님처럼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  


장황한 말보다 작은 행동 하나로 더 큰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걸 주교님을 통해 배웠다. 오늘 만난 소박한 그 뒷모습에서 느낀 감동을 잊지 못할 것 같다.


2018.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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