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트레커 브랜든 in 맥리호스 트레일
2017년 10월 현재 기온 24도. 트래킹을 하기에 선선하고 딱 좋은 날씨다. 하지만 홍콩 공항에서부터 이 선선한 날씨 때문에 걱정이 앞섰다. 평소에는 트레킹에 딱 좋은 날씨지만 작년 이맘때, 홍콩 란타우 트레킹 코스 70㎞를 완주한 병학의 말만 믿고 끈적한 습도와 모기가 윙윙대는 대한민국의 장마철을 상상하며 장비를 꾸린 게 큰 실수였다. 잘 때 추위를 막을 것이라곤 나일론 러닝셔츠 보다 얇은 침낭 내피와 하늘거리는 바람막이 하나뿐이었다.
피엘라벤 클래식 홍콩은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리는 행사로 총 100㎞의 맥리호스 트레일 코스 중 45㎞를 2박 3일 동안 텐트와 식량 등 모든 장비를 배낭에 짊어지고 걷는 글로벌 행사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독일, 태국 등 전 세계 26개국에서 약 400여 명이 참가한 이번 홍콩 대회는 130명의 트래커가 참가한 대한민국이 참가 인원수에서 단연 1등이었다.
트레킹 파티를 준비하는 백패커들
출발 전 트레킹 패스에 스탬프를 찍은 후 저울에 배낭을 올려놓았다. 물과 트레킹 폴을 포함 14.95㎏, 제외하면 12㎏.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무게. 이번 트레킹은 밤 추위만 뺀다면 딱 좋은 조건이었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트래커들이 배낭 무게를 재고, 물병에 물을 담고, 카메라를 점검하며 웃는 얼굴로 가슴 설레고 있다.
홍콩 공항에서 여기까지 교통편을 위해 알게 된 대한민국 트래커들도 배낭 무게를 재고 있다. 학교 선생님으로 처음 참가한다는 현주의 배낭 무게는 14Kg. 이탈리아 돌로미테 등 세계 여러 산은 물론 일본 산을 20여 곳 다녀왔다는 아웃도어 전문가 홍 선생은 16㎏. 괜찮은 무게다. 그런데 용 군의 배낭 무게가 24㎏. DSLR 카메라, 드론 등 영상 장비만 무게가 8㎏이다. 평소 아무리 무거워도 배낭 무게를 20Kg를 넘기지 않는 나는 용 군에 대한 걱정과 함께 그런 배낭을 멜 수 있는 나이와 체력이 부럽다.
눈을 돌리자 카타이가 일행과 함께 깔깔거리며 반갑게 맞아줬다. 카타이는 트레킹을 좋아하는 태국 아가씨로 3년 전에 스웨덴 트레킹 중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스톡홀름 관광 중에 트레킹 참가 기념 셔츠를 보고 알게 된 후 페이스북을 통해 가끔 만나는 사이다. 짧은 인사를 뒤로하고 주최 측의 출발 신호와 함께 트레커들이 좁은 산길을 따라 한 줄로 걷기 시작했다. 낯 선 트레커들은 앞에서 뒤에서 묵묵히 걸었다.
낯선 만남 속으로
세 시간 남짓 오르막을 올랐을까? 참가자들의 사이가 벌어질 즈음 이번 트레킹에서 넘어야 할 세 개의 고개 중 해발 399m의 첫 번째 고개 꼭대기에 도착했다. 바다에서 부는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은 온몸에 밴 땀을 순식간에 걷어냈다. 온몸이 상쾌해지자마자 오늘 밤 추위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으로 또 들어왔다.
말레이시아 트레커인 아린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쳐다보고 있다. 혼자 히잡을 쓰고 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트래킹을 좋아하는 이슬람 아가씨다. 채식주의자로 주최 측에서 주는 건조식이 아니라 자기 식량을 따로 가져 왔다. 트래킹 시작 전과 종료 후에 술은 커녕 BBQ 파티 음식도 먹지 못했지만, 항상 웃는 얼굴이다.
첫 캠프 장소를 2㎞ 정도 남기고 아스팔트 길을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온 셰린과 걸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 17Km. 대한민국의 여느 등산로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내 생각과는 달리 셰린은 애리조나의 건조한 사막 트레일과는 달리 적당히 습한 아열대 기후의 홍콩 트레킹이 너무 좋다는 60 전후의 미즈다.
첫날 야영지 새벽 3시, 어제 했던 잠자리 추위 걱정과 달리 뜨거운 물통을 유단포 삼아 그럭저럭 추위에서 해방되었다. 부스럭 소리와 어른거리는 랜턴 빛으로 선잠이 깼다. 옆 텐트의 스웨덴의 두 트레커가 벌써 떠 날 준비를 하고 있다. 선선한 스웨덴의 여름 날씨와 달라 뜨거운 한낮에 걷는 것은 피하고자 일찍 출발한다고 했다.
둘째 날 트래킹 거리 15㎞. 해변의 야영장을 목적지로 걷는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신천에 사는 중국 아저씨를 만났고, 신혼여행 중인 스위스 커플, 블로거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독일 커플을 만났으며, 일본인 이츠꼬와 유코를 만났다. 때로는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서로를 알았고, 때로는 묵묵히 혼자 걸었다. 오후 6시쯤 목적지인 햄틴 비치에 도착했다.
또 새벽 2시, 텐트가 펄럭 거리는 소리 사이로 어른거리는 랜턴 불빛에 잠이 깼다. 그렇게 가볍다고 자랑하던 한철의 800g의 텐트가 밤새 불어대는 바닷바람에 휘청거렸다. 비자립 식인 한철의 텐트는 가벼운 대신 팩 다운 (Packdown) 을 잘 해야 하는데 누구도 모래밭 텐트 설치를 위해 꼭 필요한 샌드 팩이 없었다. 일반 팩을 모래밭에 박아 어설프게 세운 한철의 비자립식 텐트는 바닷바람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결국 옆에서 자고있던 윤의 2인 용 자립식 텐트로 잠자리를 옮겼다. 한철과 윤은 몇 년 전 스웨덴 트레킹 때 인연을 맺은 대한민국 트레커다.
낯 선 만남에서 절친 만남으로
트래킹 마지막 날, 일찍 출발한 나는 10Km를 걸어 마지막 쉼터에 도착했다. 마지막 포인트까지 1km, 많은 트래커들이 넓은 공터에서 여유를 즐기며 여기저기서 깔깔거렸다. 트래킹 끝남을 많이 아쉬워하는 처음 참가하는 희선, 준수, 설에게 스웨덴에 이어 두 번째 참가자인 나는 아직 작은 감동이 남았다고 알려줬다. 10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코너를 돌아 마지막 체크 포인트가 보이는 순간 먼저 도착한 트래커들의 환호의 휘파람과 박수 소리가 들렸다.
먼저 들어 온 트레커의 환영 소리가 희선의 가슴속까지 전해졌는지 울컥한다. 이 행사는 우승자를 가리는 대신 먼저 결승점을 도착한 트래커가 나중에 도착하는 트래커에게 완주의 축하를 위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것이 특이하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앉아 뒤이어 들어오는 트래커들을 향해 환호를 보냈다. 먼저 도착한 트래커의 수가 많아질수록 늦게 도착하는 더 힘들고 지친 트래커들을 향한 박수와 환호는 더 커졌다. 나 또한 계속 들어오는 트래커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출발 전, 어색한 첫 만남에서 2박 3일의 인연으로 지금만큼은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절친이 되었다. 서로 기다리고 격려하며, 축하하는 사이 말이다. 우리의 인생도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고 헤어진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격려하고 축하도 하며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만의 여행을 즐기면서 말이다.
이번 트레킹에 만난 대부분은 내일이 지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몇몇은 어느 낯 선 길 위에서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See you somewhere on the r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