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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08. 2020

다섯 명의 겨울, 제주에서 쓰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보낸 겨울의 기록

한 해의 끝무렵, 엄마에게 여행 운을 띄운다. 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에 곧장 지도를 살핀다. 그런 뒤에는 모두에게 묻는다.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할머니는 후자를 택했고, 엄마와 아빠도 같은 마음이었다. 가까운 남쪽 마을에 갈까, 고민하던 중에 멀리 있는 섬이 아른거렸다. 해서 우리는 제주로 떠나기로 했다. 3년 전, 푸켓의 어느 해변을 회상한다. 해질 무렵 쌓았던 모래성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예쁜 소녀, 그리고 아빠의 미소. 곧 뜨거운 기억 위로 겨울의 조각이 내리겠지.

​꽤 오랜 전 일이다. 엄마와 막내가 빠진 가족 여행을 하게 되었다. 동생의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었기 때문. 우리는 오픈카를 빌려 제주의 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그렇게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던 중, 갑자기 차 안으로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다. 운전석에 있던 아빠는 창문을 닫는 방법을 까먹었다며 허둥댔고, 할머니는 얼른 천장을 막으라고 소리치셨다. 그 순간 어찌나 웃음이 나던지, 철없는 동생과 나는 폭소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겨울, 우리는 다시 제주에 왔다.


밤새 바람이 불었다. 커튼 너머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소리로 바람의 크기를 짐작한다. 잠에서 깬 오전 일곱 시, 어둠에 가려졌던 풍경이 아침을 밝힌다. 작년 1월 제주살이를 떠올린다. 강풍과 추위, 흐린 날씨와 싸웠던 날들.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빨래를 널거나 창고를 오가며 청소 도구를 가지러 다녔던 그때를.

아침의 시간은 소소한 대화로 채워진다. 할머니는 창밖을 보고 말한다. “저 파도 좀 봐라. 바다가 꼭 풀밭 같노.” 그러자 아빠는 말한다. “지구는 둥근데 왜 바다는 수평일까? 왜 물이 흘러내리지 않는 거야? 안 신기하냐?”


게으름을 피우던 여행자들이 아늑한 공간을 벗어난 시각은 오전 열 시. 비는 그쳤으나 바람은 멈출 생각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비자림으로 간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던 차는 어느 숲길에 멈춰 선다. 오래된 나무들이 즐비한 곳으로 몸을 내던진다. 할머니는 멀리 못 가서 걸음을 멈추신다. 이제 힘들어서 갈 수 없다는 뜻. 그 장면 때문일까. 마음이 작게 요동치면서 울컥하고 만다.

동생과 나는 할머니가 계실 자리를 마련하고 다시 숲 속으로 향한다. 사랑하는 이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두 사람은 자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너 이게 무슨 나무인 줄 아니?” 아빠의 질문에 엄마는 고민한다. “나무 박사가 이걸 모른다고? 팽나무잖니.”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 너머에서 비자나무의 잎이 ‘아닐 비’와 닮았다는 걸 배운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점심을 해결하고 귤 농장에 들른다. 근처에 족욕장이 있다는 말에 목적지를 변경한다. 오후 다섯 시, 아로마 테라피 수업이 시작된다. 먼저 몸을 가볍게 만든 뒤 분홍빛 물에 발을 담근다. 장미와 페퍼민트가 코 끝에 번진다. 지친 몸에게 위로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 허브차를 마신다. 겨울을 잊게 해 준 따뜻한 시간.

이번엔 크리스마스 전시관. 귀여운 알파카를 만난다. 벽 앞에서 사진을 찍고 나가려는데, 할머니가 양과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소녀 같은 할머니의 모습에 웃으며 묻는다. 왜 양과 사진을 찍고 싶었냐고. 그러자 그녀는 수줍게 말한다. “양이 예뻐서.” 해질 무렵. 건물 밖의 풍경에 탄성을 내지른다. 나무에 매달린 은은한 전구가 불을 밝히고 여행자들은 황홀하게 미소 지으며 거리를 걷는다. 할머니는 바닥에 비친 불빛을 보고 말한다. “왜 빛이 바람에 날아다니노.”

​그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다.

이제 집으로!




강풍이 불던 어젯밤 일은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따스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봄이 온 기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진주 같은 모습을 드러내다니, 얄밉지만 어쩌겠는가. 반짝이는 시간을 위해 다시 오는 수밖에. 야자수와 산방산이 보이는 도로에 모여 셔터를 누른다. 맑게 개인 하늘과 우리의 미소가 찬연하게 빛나는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아빠는 화면에 뜨는 지도를 무시하고 바닷길을 따라 달린다. 며칠 동안 세웠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역시 삶은 늘 알 수 없는 법. 운전자는 말한다. “큰길로 다니면 재미없어. 그건 목적지만 향해서 달릴 뿐이잖아. 우리는 지금 목적지가 없는 거야.” 그의 말은 바람에 섞여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남해와 비슷한 풍경이 이어진다. 유채꽃밭과 감자 싹이 봄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파릇파릇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다.

차귀도가 보이는 곳. 할머니는 이번에도 홀로 남겠다고 한다. 그녀가 흘려보낸 모래시계를 헤아리며 마음을 달랜다. 좀 더 일찍, 더 많은 곳을 다녀야 했는데. 그저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지.


점심을 먹고 협재 해변으로 향한다. 비양도가 보이는 곳. 이곳에 왔던 지난겨울을 떠올리며 더 많이, 또 깊이 감사한다. 파도 너머의 비양도가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해하면서. 아름다운 순간을 눈에 담고 마음껏 사랑하며 수많은 감정을 나누는 시간. 우리는 여기서 빛나는  시절을 얻는다. 언젠가 저 섬에 가서 캠핑을 하고 긴 산책을 즐기리라 다짐한다. 그때는 초록과 빈 들판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알 수 있겠지. 어린 왕자가 말한 보아뱀 뱃속의 코끼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어쩌면 서로의 민낯을 깊이 확인한 시간. 할머니가 비자림 입구에서 걸음이 느려졌을 때,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길어진다는 걸 알아챘을 때, 누군가 아빠의 나이를 몇 살이나 더 많게 얘기했을 때, 늘어난 주름을 보고 울상 짓는 엄마를 봤을 때. 그런 장면들은 나를 마구 흔든다. 아니, 조금 더 단단하게, 강인하게 만든다.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겠지.


안녕,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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