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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Mar 11. 2020

치앙마이행 열차를 타고

1월, 우리는 홍콩을 지나 방콕으로, 그리고 치앙마이로.

한 해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한다. 배낭여행, 언어 공부, 필사, 원데이 클래스, 섬 캠핑. 몇 년 전부터 계획한 일이 그대로 적혀 있기도 하고 새로운 꿈이 쓰이기도 한다. 이제는 지루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나는 여전히 이 시간을 사랑한다. 계절이 변하고 많은 것들이 삶으로 쏟아지는 동안 내가 지켜야 할 것과 하고 싶은 일을 적는 것.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을 날들을 기대하며 미소 짓는 찰나를. 그리고 다짐한다. 늘 우아하고 단정하며 예의 바르게 행동하리라고,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겠다고, 순리대로 살아가겠다고.

생의 중요한 장면은 이런 순간이 아닐까?


출국을 며칠 앞두고 여권 이름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메일을 받는다. 항공사 측에 문의를 하고 여행사에 몇 번이나 전화를 해보지만, 해결되는 건 없다. 그래도 오늘은 새해니까, 1월 1일이니까 무슨 방법이 있겠지. 우울한 마음을 외면하고 집을 나선다. 환하게 반짝이는 세상 아래 당신이 있다.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다.

옆 동네에 가서 떡볶이를 먹고 근처 카페로 향한다. 파릇파릇한 식물과 초록 테이블, 차분한 벽지의 색감이 꼭 마음에 든다. 타이머를 맞추고 핸드폰을 세운다. 전면 카메라로 찍은 탓에 새해의 첫 장면이 흐릿하게 기록되고 만다. 하지만 상관없다. 안락한 소파에서 나눈 대화나 적당한 불빛, 입술에 가득 묻은 티라미수 가루는 사진 속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그러니까  순간을 오롯이 음미하면 되는 거다.






겨울에 머무는 동안 마음을 간지럽힌 것들이 있다. 처음에는 바다와 산이 있는 섬이었고 그다음은 뜨거운 청춘들이 있는 여름 나라였다. 해서 우리는 낯선 땅을 밟기로 했다. 부지런히 계획을 세웠다. 가장 저렴한 방콕행 비행기를 끊고 해야 할 일들을 나열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에 위기를 맞닥뜨리기도 했다. 여권 이름 변경으로 생긴 취소 수수료를 20만 원이나 지불하게 된 것. 그는 고민 끝에 수수료를 내고 새로운 항공권을 끊었다. 그러니까, 직항 가격을 내고 14시간을 돌아가는 셈이다. 별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해 즐기고 오는 수밖에!


오후 여섯 시 반. 떡볶이를 먹고 짐을 챙긴다. 터미널 앞은 캐리어와 배낭을 든 여행자로 붐빈다. 몸 만한 배낭을 싣고 자리에 앉자마자 잘 준비를 한다. 버스 안은 꽤 쌀쌀한 편. 창가 자리에서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오들오들 떨자, 빈이 겉옷을 건넨다. 그렇게 한밤 중의 숙면을 즐기다 보니 어느덧 인천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공항이 익숙한 여자는 잠이 덜 깬 채로 배낭을 메고 여권이 깨끗한 남자는 들뜬 표정으로 카트를 민다.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함께 여행하면 좋은 이유가 차곡차곡 쌓인다. “공항 도착! 이제 열 시간 남았다!” 빈은 묻는다. “비행기 타면 커피 주나? 아니면 와인? 영화에서 그러던데.” 귀여운 질문에 미소가 새어 나온다. 14년 전에 머물러 있는 그의 비행은 곧 활주로를 타고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들겠지. 홍콩을 거쳐 태국으로, 또 그 너머의 나라로.



오후 7시 30분, 수완나품 공항. 원래 일정은 방콕에서 이틀을 보내는 거였지만, 계획한 날의 야간열차가 매진되는 바람에 곧장 치앙마이에 가기로 한다. 오늘 밤 티켓은 예매 가능하기 때문. 하지만 예상치도 못한 일로 위기에 놓인다. 호텔명을 적지 않았다는 이유로 통과할 수 없다는 것. 다행히 미리 예약해둔 숙소 내역 덕분에 무사히 풀려났지만 시간은 꽤 많이 흐른 상태.

배낭을 메고 그랩 탑승 장소를 찾아 헤맨다. 긴 비행이 끝나면 마냥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산 넘어 산이었다. 열 시까지 기차역에 닿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결국 그랩 예약을 취소한 후 택시 티켓을 끊는다. 트렁크에 배낭을 싣고 말한다. “Go faster, faster please.” 번역기와 간절한 목소리로 우리의 곤란한 처지를 설명한 후에야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카오산로드 근처에 도착하자 많은 감정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에도 반가운 거리가 눈에 밟히는 걸 보니, 언젠가 다시 이 도시에 오게 될 것 같다.

​4년 전 겨울, 방콕에서 보낸 날들을 회상한다. 카오산로드를 배회하며 팟타이를 먹고 더위를 피해 숙소에서 게으름을 피우던 그때. 밤이면 수많은 여행자와 클럽 음악 소리가, 낮에는 뜨거운 열기가 전부였던 그곳이 그리운 이유는 왜일까? 추억을 더듬으며 방콕행 항공권을 끊었으나 우리는 치앙마이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어야만 한다. 언젠가 엄마가 한 말이 떠오른다. 순리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비록 보고 싶은 거리의 빛깔이, 팟타이 가게가 눈에 밟히지만 떠나자.  찬란하고 꿈같은 순간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덜컹거리는 기차 위. 아름다운 밤을 기록해야지. 창밖으로 지나가는 장면, 밤공기에 섞이는 우리의 모든 감정과 단상, 여행의 모든 순간을.






10시 기차를 타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인데, 시간이 남았다. 역 편의점에 들러 라면과 빵 두 개, 물을 품에 안고 아늑한 침대로 향하는 길. 아아, 이게 얼마 만의 기차 여행인가. 한 칸에 모여 있는 여행자들도, 창밖의 풍경도. 많은 것들이 행복을 안겨준다. 그중에 가장 큰 기쁨은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

빈은 말한다. 어서 땅을 밟고 걷고 싶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눕는다. 내일은 맛있는 밥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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