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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09. 2019

인터라켄에서 생긴 일

융프라우와 브리엔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융프라우에 가기로 한 날. 날씨를 확인해보지만 예감이 좋지 않다. 메테오-스위스 날씨 어플-가 맞다면, 나는 먹구름에 가려진 산을 헤매다 돌아오게 될 테니까. 비싸게 산 VIP 패스권이 아까워서 잠시 고민한다. 그렇게 얼마 후, 결론을 내린다. 호스텔 식구들을 따라 옆 마을에 가는 것. 목적지는 브리엔츠였고, 이동 수단은 자전거로 정했다. 운동신경이 없는 나는 걱정이 앞섰으나 어쩐지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문득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 자전거로 무전여행을 떠났던 어느 여름, 끝없는 오르막길에 지친 여행자는 도로에서 SOS를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 매정한 차들은 인정 없이 제 갈길을 갔고, 태양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던 중, 그의 앞에 멈춘 트럭 한 대. 아저씨는 자전거 여행을 했던 지난날을 꺼내며 미소 지으셨다. “자, 내려. 여기부터 내리막길이야. 이제 마음껏 즐기라고.”







오르막길에서 멈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넘어지고 만다. 아빠의 운동신경은 물려받지 못한 게 분명하다. 오빠와 주영이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킨 후 다시 달리기로 한다. 변속기어를 9단으로 올리고 마을로 향했다. 지나치는 모든 것과 산뜻한 바람이 사랑스러운 날, 주어진 순간을 향유할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낯선 곳에서 만난 여유는 한없이 따뜻한 법.







호수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작은 마을이 보인다. 좋은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며 앞장서는 정욱오빠를 쫓아 내려간다. 솜사탕 같은 포근한 구름 아래, 어느 마을의 다정한 장면을 만난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호수와 기찻길, 멋진 정원, 그리고 비키니 차림의 할머니. 맥주병인 나는 물 근처에 갈 생각도 없는데, 두 남자는 수영을 하느냐 마느냐, 실랑이를 벌인다. 한참 동안 입씨름을 한 그들은 입수를 나중으로 미룬다.








몸의 근육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도보 여행에 익숙해진 내가 자전거를 타고 2시간을 달렸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넘어질 때 다친 손바닥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전거 여행에 매료된다. 스위스에 다시 온다면, 그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전거를 빌리게 되겠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시 경사진 언덕을 오른다.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자, 허벅지의 온 신경이 고통을 호소한다. 그럼에도 마냥 즐겁기만 한 자전거 여행.








호수에는 물놀이를 하는 백조 가족이, 산책로에는 고요를 누리는 이들이 있다. 자전거를 반납한 뒤,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우리의 결정은 피자와 파스타, 리조또. 세 사람이 함께하는 마지막 식탁. 아쉬운 마음이 마구 일렁인다. 커피를 마시고 오후 일정을 고민한다. 오빠와 막내는 호수에서 하지 못한 수영을 하러 간다고 했다. 나는 해먹에 누워 쉴까, 했지만 융프라우가 눈에 밟혔다.







결국 기차를 타고 설국으로 향했다. 무료한 시간이 흘렀고, 오랜 기다림 끝에 정상에 도착했다. 어지러움을 참으며 찾아온 융프라우에는 흩날리는 눈발과 실망한 표정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욕심내지 말걸.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이며, 나의 좋은 경험 이리라. 그렇게 피로를 잔뜩 얻고 다시 집으로. 기차역에 도착하자, 정상에서 보지 못한 산맥과 설경이 펼쳐졌다. 욕심 끝에 남은 것은 피로와 후회였으나, 긴 여정을 통해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는 일이 꽤나 유쾌했다. 해먹에 누워 고요를 즐겼다면, 오늘은 그저 평탄한 하루로 남았겠지. 다사다난했던 오후를 좋은 기억으로 묻어두고 캠핑장으로 향한다. 30분쯤 걸었을까, 멘리헨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하얀빛에 이끌려 걷다 보니 반가운 사람들이 보였다.







캠핑장에서 만난 우리. 정욱오빠가 고기를 굽는 동안 윤오오빠와 나는 식탁을 책임진다. 야채와 과일, 익은 햇반과 고기가 넉넉한 저녁을 선물한다. 스위스에 온 지 일주일째, 드디어 익은 쌀을 먹었다. 단란한 저녁나절, 우리가 함께 보낸 장면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덧 가까워진 이별의 순간. 아쉬움이 남은 세 사람은 함께 산책을 나서기로 한다. 가로등 몇 개가 전부인 스위스의 밤,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해 걷는 일이 어쩐지 낭만적이다. “내일 아침에 만나.”


긴 하루 끝에 감사를 전하며,

인터라켄에서 쓰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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