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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05. 2019

여기선 밤새 걸을 수도 있겠어

결국 파리로 가는 기차를 포기하고 스위스에 더 머물기로 했다.

스위스에서 맞는 5일째 아침, 먹구름이 가득 펼쳐진 하늘 아래 뮈렌으로 향했다.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는 별 기대 없이 기차에 오른다. 열차는 몇 개의 역을 지나 종착역에 닿았다. 뮈렌에 도착하자 거짓말처럼 날이 개었고, 황홀한 아침 전경이 이어졌다. 꽃이 만개한 산 위의 작은 마을, 트롤리어스와 초록 언덕에 사는 사람들, 눈 내린 산맥의 모습.










계획했던 뮈렌 구경을 뒤로하고 정상에 가기로 한다. 맑은 하늘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 곤돌라를 타고 3,000m쯤 되는 곳에 도착한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오기라도 한 듯 엄청난 추위가 엄습한다. 돗자리로 쓰려고 산 얇은 천을 덮고 깎아진 절벽 옆을 걸었다. 높은 산이 마냥 신기한 아이들과 추운 줄도 모르고 눈밭을 헤매는 개, 흔들 다리에 겁먹은 여행자들. 수만 가지의 감정이 쉴트호른에 퍼지는 동안 산맥 위로 내린 눈은 하릴없이 반짝였다. 컵라면을 먹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이번엔 라우터브루넨까지 걷기로 한다. 기찻길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 키가 큰 나무 아래 조깅하는 사람들, 넓은 평원에 자라나는 모든 생명을 축복했다. 먼발치에 엄청난 폭포가 보였다. 아침에 산 초콜릿을 먹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다. 동굴을 따라 도착한 정상, 크고 긴 물줄기가 아닌 작은 물방울을 만난다. 그 장면은 어떤 교훈을 준다. 작은 힘이 모이면 폭포를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숙소로 돌아가는 길. 쿱에 들러 쌀과 라면을 사고 요리를 시작했다. 오늘 저녁도 한식이라니! 이 만한 축복이 또 있을까. 6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주영. 팔이며 목이며 새까맣게 탄 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린다. 세 사람이 모여 부대찌개에 설익은 밥을 말아먹는다. 막내는 산행을 하며 체력을 얼마나 쓴 건지, 저녁식사 후 숭늉을 끓여 먹더니 아이스크림을 먹잔다.

“하몽이랑 멜론이 그렇게 잘 어울린대. 단짠의 조화가 끝내준다고.”

정욱오빠가 추천한 메뉴를 입에 넣었지만, 입 안에는 물음표만 남는다. 으음, 그의 말에 동의하긴 어렵겠다. “이게 무슨.. 저는 그냥 멜론만 먹을래요.”

밤공기와 아이스크림, 모두의 웃음으로 막을 내린 저녁. 결국 나는 스위스에 더 머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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