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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04. 2019

유월의 눈밭에 서다

그린델발트 역, 그리고 긴 하이킹 끝에 도착한 바흐알프제.

새벽부터 체크아웃 준비를 하는 부지런한 이들 덕분에 이른 아침을 맞았다. 쌀을 들고 주방에 갔는데, 막상 요리를 하려니 귀찮았다. 좋은 음식을 먹겠다고 다짐한 지 이틀이 흘렀다. 위를 혹사하는 듯한 죄책감이 목을 죄어온다. 결국 빵을 굽고 그릇 위에 시리얼을 부었다. 소화를 돕기 위한 뜨거운 그린티도 한 잔. 밀가루라면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서 아침을 거르는 건 조금 억울해서.


그렇게 간단한 조식을 먹고 새로운 호스텔로 걸음을 옮긴다. 좀 더 낡았고 기차역과 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쩐지 아늑한 분위기가 풍겼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청년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버스 시간을 물었더니 15분쯤 기다려야 한다고 답한다. 그렇게 기다리느니 걷고 말지. 뚜벅이에 익숙한 여행자는 두 다리에 의지해 기차역으로 향한다. 마당에서 정원을 가꾸는 아저씨,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두 손 가득 맛있는 음식을 든 누군가의 모습이 아침의 활기가 된다. 엄마에게 걸려오는 영상 통화에 재빨리 응답한다. “저는 산에 갑니다. 어제 하루 종일 쉬어서 그런지 몸이 개운해.” 옷 색깔이 스위스와 잘 어울린다며 소녀처럼 웃는 그녀에게 손키스를 보낸다.




인터라켄 동역, 융프라우 VIP 패스권을 끊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대로 그린델발트행 기차를 놓치는 건가, 싶었는데 가까스로 탑승에 성공한다. 빈 좌석을 찾아다니던 중, 호스텔에서 본 한국인 무리와 마주친다. “어, 또 만나네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하이킹에 합류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하이킹 코스를 정한다. 지도를 보며 어딘가로 향하는 일은 늘 설레는 법. 서로의 의견을 맞춰 하이킹을 시작한다. 이 나라에 온 지 3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든 게 새롭기만 하다.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감탄을 멈추지 않는다. 스위스에 사는 사람들은 이 풍경에 익숙해졌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기도 하면서. 한참을 걷다 갈림길에 선 네 사람. 어떤 이는 지도를 확인하고, 또 어떤 이는 감을 믿자고 말한다. 고민 끝에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앞서 가는 사람들 뒤를 쫓는 것.







그렇게 30분쯤 흘렀을까, 높게 쌓인 눈더미에 여러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그 낙서 가운데 가장 크게 새겨진 알파벳, DOLLY.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메라를 켠다. “오빠, 제가 루체른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쓴 친구 이름이 돌리거든요? 음, 또리라고 불러달라고 해서 돌리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어쨌든 저기 이름을 남긴 사람이 그 친구면 진짜 신기할 것 같아요.” 정상으로 향하던 중, 한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Do you remember me?” 선글라스를 벗고 익숙한 미소를 짓는 여행자. 루체른에서 바란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우리의 인연이 피르스트까지 닿을 줄이야. 너무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안았다. 또리는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을 묻더니,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긴 하이킹 끝에 도착한 바흐알프제. 흐린 하늘 아래 설산과 호수의 경계가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다. 곧장 짐을 풀고 소소한 피크닉을 시작한다. 아침 일찍 만들었다는 샌드위치를 받고 루체른에서 산 초콜릿을 건넨다. 산을 사랑하는 주영이는 들뜬 표정으로 호수를 산책했고, 나는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얼마 후, 구름이 걷히면서 호수에 비치는 것들이 더 강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짧은 피크닉을 마치고 6월의 눈밭에 섰다.








계속해서 그림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해가 반짝하더니 구름이 빠르게 움직였다. 프라하에서 산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바흐알프제를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배낭을 멘 막내에게 괜찮냐고 묻자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어 보인다. “나 오늘 걸어서 내려갈 거야.” 주영이의 패기를 가볍게 무시한다. “응, 우리 이따 다 같이 곤돌라 타야 돼.”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소와 양들이 걸어 다닐 때마다 종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졌다.







인터라켄으로 돌아가기 전에 쿱에 들렀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곤 샌드위치 한 조각과 초콜릿이 전부였던 우리는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장기 여행자들에게 과소비는 금물. 1프랑짜리 캔 옥수수를 안고 열차에 올랐다. 맞은편에 앉은 승객과 눈이 마주친다. 그의 이마에 쓰인 투명한 문장. -저는 한국인입니다. 오지랖 넓은 나는 옥수수콘을 먹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그를 발머스-숙소-에 초대했다. “이따 고기 굽고 부대찌개 끓일 건데 올래요? 발머스에 있는 한국인은 저희가 전부예요.”






빌리지가 붐비는 바람에 키친에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끼니를 챙기는 일에 싫증을 느꼈던 날들이 스쳤다. 한 끼를 먹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무의미한 것 같기도 했고, 혼밥에 지치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엄마가 더 보고 싶은 요즘. 오랜 세월 동안 여섯 식구를 위해 장을 보고 국을 끓였을 그녀의 마음을 천천히 헤아리며 울컥했다.


밥을 하고 상추를 씻으며 만찬을 기대했다. 부대찌개와 삼겹살, 그리고 쌀. 정말이지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저녁이었다. 굶주린 위에 건강한 음식이 가득 채워진다. 그 많던 부대찌개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테이블 위로 좋은 기운이 흘렀다. “지영아, 너 전공이 피아노라고 했지? 거실에 (피아노) 있던데.” 오빠의 한마디에 먹은 게 다 넘어올 뻔했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무대에 선다는 건 꽤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연주를 시작한다. 틀린 음을 내기도 하고 다른 화성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렇게 영원 같은 순간이 지나고 연주도 끝이 났다.

고요한 밤. 비에 젖은 풀냄새를 맡으며 산책을 나섰다. 런드리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으로 네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각자의 여행에 대해 나눴다. 느린 웃음과 진실된 마음도 함께. 타인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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