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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04. 2019

여행자의 마음 산책

똑똑하게 여행하는 방법 하나, 배낭을 잠시 내려놓는 것.

잠에서 깬 아침, 또리와 눈이 마주쳤다. 한 시간도 넘게 짐을 챙겼다며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기만 하다. 배낭 깊숙이 넣어둔 엽서를 꺼내 또리에게 선물한다. 활짝 웃더니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며 종이와 펜을 건네는 그녀. 이메일을 적어준 후,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우연을 바란다. 예쁜 또리의 미소와 작은 목소리를 오래 기억할 수 있기를, 언젠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서로를 마주칠 날이 오기를.









가영이와 카페테라스에 앉아 크로와상을 나눠 먹고 티켓 창구로 올라갔다. 마지막까지 친절한 친구를 꼭 안아주고 12번 플랫폼으로 향했다. 11시 기차에 오르자, 차창 너머로 빛나는 호수와 산길이 펼쳐졌다. 벅찬 감동을 표현할 길이 없어 감탄사 대신 큰 숨을 한 번 내쉰다. 침묵을 지키는 것에 꽤 익숙해진 것 같다. 열차의 흔들림을 느끼며 사색한다. 길 위에서 배운 많은 것들, 혼자 왔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던 날들에 대해.






브리엔츠 역, 앞 좌석에 나란히 앉은 인도 꼬마들이 눈을 크게 뜨고 사랑스럽게 미소 짓는다. 가위바위보로 차례를 정하고 손바닥 놀이를 시작하는 작은 승객들. 그들만의 세상을 구경하다 보면 마음 가득 평화가 깃든다. 예전부터 인도에 가고 싶었고, 인도의 전통 차를 사랑한다고, 너희의 미소는 정말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게임의 방해꾼이 되고 싶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목으로 넘기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흘러가는 시간에 아쉬움이 남는다. 빠르게 스치는 모든 것들이 그리움이 될 것을 알기에.








체크인까지 3시간도 넘게 남았는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요플레와 과일, 크로와상을 머릿속에서 지운 뒤, 어떻게든 뭔가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어차피 점심은 또 라면이겠지만. 배를 채워야겠다는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터라켄역에 내리자 루체른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스위스가 펼쳐졌다. 따가운 햇살 아래, 지도에 찍힌 숙소로 향한다. 활기가 넘치는 상인들과 어디선가 퍼지는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걷던 중, 엄마에게 걸려온 페이스톡. 재빨리 전화를 받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한국으로 보낸다.

“엄마, 나는 지금 막 인터라켄에 도착했어. 내 짐 보여? 어깨가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어. 거긴 어둡네. 오늘 저녁 메뉴는 뭐야?”
“호박찌개. 가지볶음도 할 거야.”
“맛있겠다. 내 것도 남겨줘. 제발.”






숙소에 짐을 풀고 라면을 끓였다. 매운 냄새에 기침을 하며 스스로를 달랜다. ‘이것 만큼 내 허기를 채워줄 만한 좋은 음식은 없지.’ 거짓 위로와 함께 점심 식사를 마친다. 취사가 되는 호스텔에 도착했으니, 저녁엔 꼭 밥을 먹겠다고 다짐한다. 설거지를 하고 잠깐 소파에 앉았는데, 피로가 몰려들었다. 인터라켄 구경을 미뤄두고 단잠에 든다. 오늘은 마음 가는 대로. 잠에서 깨고 보니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가방 안에 든 초콜릿을 꺼내 먹는다. 나른함이 계속되는 오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 상태를 살핀다. 나는 여행 중에 충분한 휴식을 취했는가?







슈피츠에 갈 생각이었으나 쉼이 필요하다는 몸의 신호에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평안을 얻는다. 정원에 핀 꽃과 맨발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에. 그들의 눈동자에 여린 순수함이 막 빛나기 시작할 때, 뜨거운 햇빛이 잔디 위를 덮었다. 하늘에서는 꿈같은 비행에 도전한 사람들이 줄지어 내려오고, 구름이 걷히자 설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촌오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 테면 여행에서 얻은 깊은 고독과 굶주림 같은 것들. 요리를 전공한 그의 관심사는 오직 ‘유럽 음식의 맛’이었다. 하지만 가난한 여행을 이어가고 있는 나는 제대로 된 유럽 음식을 알 턱이 없었다. 결국 오빠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 채 통화를 마쳤다. 점심에 먹은 라면이 꺼지진 않았지만 동역에 있는 쿱-스위스 대형 마트-으로 향했다. 0.5프랑 더 싼 바나나를 사겠다고 15분을 걸을 줄이야. 다 쓴 샴푸와 선크림을 바구니에 담고 싱싱한 양배추를 고른다. 그런 뒤에는 계란과 바나나를 찾는다.

다시 돌아온 숙소. 지하에 모인 한국인들은 단체로 삼겹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요리를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계란과 토마토소스로 만든 간단한 저녁상이 초라해 보일까 봐. 결국 바나나 두 개와 샐러드, 그리고 남은 파인애플 스무디로 저녁을 대신한다. 아, 엄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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