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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7. 2019

낭만에 취한 밤에

얼마 간의 수다 끝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혼자가 아닌 밤에 감사하면서.

귀국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스페인을 떠날 때, 낡은 캐리어를 받았다. 큰 캐리어 하나를 끌고 작은 백팩만 어깨에 메고 걷는다. 이제야 어깨의 고통을 덜어내는가 싶었지만, 캐리어 여행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정신이 혼미해지곤 한다. 예를 들면 엘리베이터가 되지 않는 숙소에서 5층까지 올라가야 할 때. 15킬로의 짐을 들고 겨우 방에 도착한다. 이번엔 어깨가 아닌 팔이 문제였다. 더 이상 필요 없을 줄 알았던 파스를 꺼낸다. 짐을 풀고 기차 예매 사이트에 접속한다. 하지만 나는 화면에 뜨는 문장을 하나도 해석할 수 없었다. 결국 거실 소파에서 축구를 보던 이웃에게 도움을 구한다. “Do you know spanish?”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독일인 다비드. 그는 몇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예매가 성공할 때까지 번역기 역할을 해준다. 한 학기 동안 배운 독일어 수업은 여행 내내 큰 도움이 됐다.


“Danke schöne, David!” -다비드, 정말 고마워요!-







오늘의 목적지는 렐루 서점.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이 소설을 쓰며 영감을 얻었던 곳이다. 서점에 가까웠을 때쯤 생각 지도 못한 긴 줄에 경악한다. 재빨리 티켓을 끊고 줄 끝에 선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트럼펫 연주에 설레는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기다림 끝에 선 입구. 티켓을 내고 서점 안으로 향한다. 벽면 가득 채워진 책과 각국의 여행자들. 나는 그 사이에서 얇은 시집 한 권을 들었다. 불을 끄고 램프를 들면 해리포터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람들 틈에 치어 이곳의 온전한 분위기를 누리긴 힘들었지만, 어떤 영감을 얻기엔 충분했다.






오후 세 시, 포르투 공원의 분주한 어른들과 천진난만한 웃음을 띤 아이들. 그 너머로 보이는 영화 같은 장면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다정한 연인은 트램이 지나간 자리에서 입을 맞춘다.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기도 하면서. 얼마 후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더니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본다. 그들의 애틋한 마음은 누군가의 그리움이 된다.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속삭여야지.






늦은 오후, 우연히 알게 된 동행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 두 남자는 꽤 유쾌했다. 잦은 정적이 흐르기도 했지만. “저녁 먹고 야경 보러 갈래요?” 우리는 다리를 건너 성당에 도착했다. 갈매기들은 낮게 비행했고 햇빛에 물든 건물들은 마법을 부렸다. 포르투의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해질 무렵, 얇은 초승달이 희미하게 빛났다. 금세 어둠이 내리고 도시에 켜진 불빛이 강가를 비췄다. 기대했던 순간을 만난 밤, 이 깊은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인들이 모여 있는 힐 가든으로 향했다. 수도원 불빛에 물든 갈매기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 돗자리에 나란히 앉은 모두가 어색한 듯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경직된 분위기는 술기운에 풀어지고, 청춘들의 대화가 밤을 노래한다. 배낭 안에 남은 햇반 개수와 먹고 싶은 한국 음식, 그리고 크고 작은 실수 같은 것들로. 그러다 베를린에서 온 수진이가 입을 연다. “나는 독일에서 밤마다 파티를 했어. 아마 한국에 돌아가면 가장 생각나는 게 술일 거야.” 얼마 간의 수다 끝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혼자가 아닌 밤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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