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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8. 2019

유럽의 서쪽 끝에 서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울음 섞인 미소를 짓고, 우리는 다시 길을 걷는다.

포르투갈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아침. 짐을 챙긴 후 준비를 마친다. 역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공용 화장실 앞, 화장실에서 나온 남자가 문을 잡아주며 웃는다. 고맙다며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따라 들어와 말한다. “I love you.” 기분 나쁜 기운을 직감하고 그의 어깨를 밀친다. 그런 뒤에는 곧장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식은땀을 흘리며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계속되었지만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전 10시, 신트라행 기차 안. 원호 오빠가 건네는 위로에 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울음을 그치고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여행을 이어간다. 기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신트라에 멈춘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성을 향해 걷는다. “어디서 옥수수 찌는 냄새 안 나?” 준오 오빠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다. “뭐, 여기가 설악산이야?” 생각지도 못한 등산의 시작. 가파른 경사에 땀을 닦는다. 하지만 내가 자연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더 분명하게 와 닿는다. 숨이 차오르는데도 감탄을 멈출 수 없는 걸 보니. 정상에 오르자 신트라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힘겹게 걸어온 보람이 있다.







오후 3시, 구불거리는 길이 길게 이어진다. 아침에 마신 쓴 커피가 빈속을 괴롭게 한다. 한참을 달린 버스는 목적지에 닿고, 배낭을 멘 이들은 웃으며 달려 나간다. 유럽의 최서단 호카곶에 도착했다. 에그타르트와 과자 한 봉지로 허기를 달랜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곳을 향해 걷는다. 우리가 멈춘 곳은 십자가 탑. 십자가 아래 적힌 구절을 읽는다. “Onde a terra acaba e o mar comeca.(여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순례를 마친 사람들은 울음 섞인 미소를 짓고, 우리는 다시 길을 걷는다. 파도치는 절벽 어딘가,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기타 치는 청년이 보인다. 멋진 연주자가 되는 눈부신 상상을 하다가,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지’ 하고 다짐한다. 때로는 욕심을 낼 줄도, 그리고 내려놓을 줄도 아는 게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호카곶에서 카스카이스로 가는 길, 지독한 멀미에 지치고 만다. 수서 언니는 자기 손을 베개 삼아 내 머리 뒤로 가져다 댄다. 그 찰나의 순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온도를 느낀다. 버스가 카스카이스에 도착하자 정신이 들었다. 들판 위에 핀 꽃들과 부는 바람에 마음을 추스르고 해변 앞에 선다. 서로의 마음에 파도를 만드는 연인의 모습에 미소가 번진다. 사랑스러운 장면을 등지고 기차역으로 향한다. 이제는 리스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  







호스텔에 돌아가 짐을 챙겼다. 끝까지 미소와 친절로 대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레스토랑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고 역으로 향한다. 녹초가 되면 침대에 누워 발을 뻗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 기대에 부푼 채 티켓에 적힌 자리를 확인한다. 10번 3D. 내 좌석은 침대칸이 아닌 의자 칸.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차장 아저씨께 남은 침대칸이 있냐고 묻자 고개를 흔든다. 누울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적인 밤을 맞는다. 목이 말랐지만 손가락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보조배터리의 불빛은 한 칸, 마드리드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 엄마 일어나면 카톡 해줘.
한국은 새벽 네 시 반. 엄마는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철없는 딸은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엉엉 울었다. 미열에 멀미에, 몸 상태가 최악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만다. 잘 지낸다는 안부를 전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서러운 감정을 잔뜩 늘어놓았다. 엄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기차 몇 시간 타는 거야? 언제 도착해?” 딸은 하소연을 시작한다. “10시간. 내일 아침 8시에 도착해. 침대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터널에 진입하자 연결이 끊겨버린다. 집을 떠나온 지 47일째. 배낭을 메고 유럽 곳곳을 헤매는 동안 마음을 돌보는 일은 까맣게 잊었던 것 같다. 방전된 체력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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