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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8. 2019

리스본행 열차에 몸을 싣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곳, 안녕.

호스텔 키를 잃어버려서 5유로를 지불한다. 이 와중에도 배고픔은 잊히진 않는다. 조식을 먹고 숙소를 나선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배낭이 몇 배는 무겁게 느껴지는 아침. 상 벤투 역에 도착한다. 기차 출발 20분 전에 역에 도착하다니, 역사적인 날이다. 길을 알아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여유롭게 포르투의 마지막 순간을 누린다. 거리에는 영화 촬영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카메라 몇 대가 보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곳, 안녕. 플랫폼을 확인하고 브라질에서 온 아저씨와 대화를 나눈다. 오늘은 무사히 잘 도착하기를. 가방에 든 티켓을 꺼내 환승역을 재차 확인한다.








리스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앉은 한국인이 말을 걸어온다. 베를린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이라는 영은. 밝고 씩씩한 친구다. 우리는 지난 여정을 회상하며 서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알아듣지도 못 하는 언어를 배우면서 일을 하고 집 값을 내고. 아, 정말 어떻게 버텼나 몰라요.” 그녀의 지난날에 존경을 표한다. 긴 수다에 허기를 느끼고 과자를 꺼낸다. 빈속에 불량하고 자극적인 맛이 전해지자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손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리스본에 도착하면 맛있는 점심을 먹어야지.







몸살 기운이 도는 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마에 손을 대자 약하게 느껴지는 미열. 인상을 쓴 채 눈을 감는다. 잠은 고통을 잊게 한다. 나른함을 느끼며 잠에 빠져들 때쯤, 연우에게 온 연락을 받는다. -포르투갈 좋아?- 이 나라는 무척 아름답지만, 나는 지쳤다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공감하며 지친 기색을 보였다. 장기 여행자들은 여행을 하며 큰 배움을 얻는다. 집 나가면 개고생 이라던가, 매일이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 같은.







리스본에 도착한 오후 두 시. 짐칸에 실린 캐리어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바퀴가 빠지고 만다. 아아, 캐리어를 받은 지 이틀 만에 다시 배낭 여행자로 복귀라니. 결국 영은이와 택시를 타고 시내로 이동한다. 리스본은 포르투보다 훨씬 더웠다. 하지만 남은 자리는 야외뿐. 뜨거운 태양 아래 늦은 점심을 먹는다. 익은 쌀이 위를 채우자 금세 몸의 회복을 느낀다. 얼음이 담긴 오렌지주스를 들이켜고 가게를 나선다.








호스텔은 도보로 8분 거리. 캐리어 바퀴 하나의 존재감이 꽤나 크게 느껴졌다. 돌길을 겨우 지나 호스텔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고장을 알리는 종이를 보고 탄식을 내뱉었다. 건장한 청년들의 도움에 위기를 면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해먹이 비치되어 있다던 호스텔에 해먹은 없었고,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짐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내 작은 울음소리를 들은 같은 방 친구가 휴지를 건넸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때마침 사촌 오빠에게 걸려온 전화에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전했다. 그의 다정한 위로에 눈물을 그친다. 뜨거운 물로 샤워한 후 빨래를 돌린다. 모든 게 깨끗해진 덕분일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게스트룸 소파에 누워 눈을 감는다. 미지근한 바람이 몸을 감싸자 안정을 되찾는다.







한산한 밤,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 주문한 메뉴는 전부 성공. 하지만 평소처럼 과식을 할 수는 없었다. 입맛이 없기도 했고. 결국 야경을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방문을 열자, 오후에 만난 방 친구가 인사를 건넸다. 괜찮아졌냐고 묻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바퀴가 빠진 캐리어는 버릴 생각이고, 내일 리스본을 떠날 거라고. 그런 뒤에는 굿나잇 인사를 보내고 불을 끈다.


긴 하루의 끝, 내일은 더 씩씩하게 여행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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