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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9. 2019

자, 이제 행복을 마셔요

스페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잔잔한 평온이 마음에 내려앉는다.

달리는 기차 안.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린 새벽의 흔적에 눈썹을 찡그린다. 퉁퉁 부은 눈과 얼굴. 이 붓기를 어떻게 가라앉힐 수 있을까.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허기를 달래는 것.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4시 37분, 남은 배터리는 고작 2퍼센트 정도였다. 옆 좌석에 남겨둔 비상식량을 꺼낸다. 사실은 쓰레기통이 너무 멀어서 버리지 못한 음식. 이렇듯 배고픔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모두가 잠든 사이, 야식도 아침도 아닌 새벽의 식사를 마치고 다시 눈을 감는다.






마드리드에 도착한 아침. 열차를 벗어난다. 어찌나 몸이 쑤시던지. 두 번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차 여행이었다. 좁디좁은 의자에서 꼼짝없이 10시간을 보낼 줄이야. 긴 밤을 잘 견뎌낸 스스로를 기특하게 여기며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낸다. 국경을 넘어 다시 돌아온 스페인. 핸드폰이 꺼진 바람에 길 잃은 미아가 된다. 카페에 들어가 핸드폰을 살리기로 한다. 아침은 아메리카노와 크로와상. 배터리를 충전시킨 뒤 마지막 숙소로 향한다.







드디어 도착한 호스텔. 키를 받고 조용히 환호한다. 계단을 오를 일도, 화장실을 가기 위해 방을 나갈 필요도 없었기 때문. 도미토리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1층 침대가 아닐까? 방에 들어와 대충 짐을 푼다. 침대 위에 놓인 두 개의 베개와 아늑한 분위기는 여행자의 마음을 녹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침대에 눕는다. 오늘 목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쉬움을 모른 척한다. 이것 또한 여행의 일부였으니.








긴 낮잠을 자고 숙소를 나선다.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보였다. 정신이 맑았지만 몸은 나른하기만 했다. 결국 계획한 일정을 전부 중단한다. 가장 기대했던 프라도 미술관도, 근처에 있는 공원도 가지 않는다. 내일의 비행을 위해 체력을 아끼는 게 더 중요했으니.


가벼운 산책 중에 작은 서점을 만난다. 여기저기 쌓여 있는 책과 할머니가 시선을 끄는 곳. 엽서 가판대 앞에 한참을 서 계시는 할머니를 보고 먼 훗날의 내 모습을 상상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생겨도 여전히 엽서를 좋아하고 낡은 책방을 드나들고 있을까?







늦은 오후, 저녁 식탁을 고민한다. 근처에 있는 산 미구엘 시장에서 배를 채우기로 한다. 가까이에 시장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모든 나라의 시장은 여행자들로 붐빈다. 과일 가게 직원과 술을 제조하는 아저씨, 잔을 들고 행복을 마시는 사람들. 모두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 민트 초콜릿 한 컵을 주문한다. 얼마 후 달콤한 선물을 받는다. “Gracias!-감사합니다!-” 곧 이 서툰 발음마저 그리워지겠지.






긴 여정의 막을 내리는 밤, 불 켜진 골목과 마드리드 거리를 카메라에 담는다. 누군가는 이 순간을 종이에 남긴다. 멋진 화가 할아버지의 그림은 누군가의 행복이 되겠지? 마요르 광장, 아름다운 음악에 취해 걷는다. 마지막이 될 이 장면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모든 시간을 천천히 누린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단체 관광객이나 거리의 연인들, 촬영을 나온 신혼부부의 모습이 보인다. 더 이상 그들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내일이면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닿을 테니. 안녕, 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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