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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롤 Jun 29. 2019

안녕 나의 찬란한 날들

방랑 생활 50일째, 가장 의미 있는 여정에 오른다.

제주에 내린 폭설로 공항이 마비가 됐던 올해 겨울, 친구는 비행기가 연착되길 간절히 바라며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야속한 항공사는 정상 운행을 알렸고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육지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어느 봄, 나는 긴 비행을 시작했다. 여덟 개의 나라를 헤매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게 50일이 흘렀고, 계절은 어느덧 여름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갈 준비를 하는 위층 침대 이웃 덕분에 늦잠을 면한다. 몸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공항에 도착해야 했다. 짐을 챙기고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능력을 주신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외칠 것이다. -순간이동의 힘을 주세요.라고 말이다. 그런 마법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탑승 수속을 마친 후, 휴식한다. 그러던 중 작게 들려오는 러시아어에 고개를 돌린다. 강아지와 대화하고 계시는 할머니가 보였다. 열차에서 일주일간 배웠던 짧은 회화가 스쳤다. “쁘리븨예트! 미냐 자붓 지영. 프씨붜 하로씨버.” 다냐 할머니도 느릿느릿 자신을 소개하시더니 반갑게 웃으신다. 오늘 경유지는 모스크바. 여행의 출발점이었던 러시아 땅을 다시 밟는다니. 어쩐지 긴 여행을 매듭짓는 기분이 들었다.





오전 11:40, 모스크바로 출발. 옆자리에 탄 남자는 내 비행기표를 보더니 인천에 가냐고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자 목적지가 같다며 웃는다. 스페인에 사는 하이메. 그는 여자 친구를 보러 한국에 간다고 했다. 함께 제주도를 여행한 뒤 부산과 울산에서 머물 거라고 한다.


오후 14:59, 눈앞에 사랑하는 카레가 있었지만 먹을 수 없었다. 몸이 음식을 거부했기 때문. 최악의 상황이 번복될까 두려워 샐러드만 입에 넣는다. 하이메에게 한국 음식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산 낙지 먹을 거예요.” 어설픈 발음으로 한국말을 하더니, 불닭볶음면은 너무 맵다는 말을 덧붙인다. 흐흐.





저녁을 먹고 인천행 비행기에 오른다. 남은 유로는 70센트. 이제는 가방을 지킬 필요도, 소매치기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차창 밖으로 모스크바의 밤이 여러 빛깔로 반짝였다. 짙은 하늘색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들다 컵을 떨어뜨리고 만다. 옆좌석 아저씨는 쏟아진 물을 모른 체 해주시고 짐을 들어주신다. 이런 순간들은 긴 여행과 비행을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남긴다.





밤 열 한시 반, 비행기는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 옴스크로 향하고 있다. 해가 뜨기도, 눈이 내리기도 하던 봄의 열차 생활이 떠오른다. 매일 밤 침대 위에 올라와 굿 나잇 키스를 보내던 마디나, 식탁 위에 딸기잼과 라면을 차려주고 씽긋 웃었던 바하, 열차에 탄 세 여자가 눈물을 흘렸던 정차역, 닷새를 함께한 마리나가 옴스크에서 내리면서 혼자가 되었던 날. 한국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토록 많은 조각을 꺼내며 울컥할 줄이야. 내가 여행했던 도시들과 멀어져 원점으로 향하고 있다.






눈을 떠 보니 활주로였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한국 땅을 밟는다. 홀로 여행하며 많은 여행자를 만났고, 우리는 식탁 위에서 배웠다. 집밥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는 것을. 방랑 생활 50일째, 가장 의미 있는 여정에 오른다. 오늘의 목적지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우리 집. 어느 때보다 밝게 전화를 받는 엄마의 목소리에 웃음이 났다. 그리운 사람들과 가까워진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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