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속도

by 앨리스킴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가 함께 살아가는 나라다.

종교도, 언어도, 생활 방식도 다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섞여 살면

갈등이 더 잦을 법도 한데,

막상 마주한 그곳의 공기는 차분했다.


어쩌면 이 나라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이미 전제로 삼고 살아가는 곳인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고,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저 각자의 방식이 있다는 걸

조용히 인정하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나 외국인에게도

배타적인 느낌은 없었다.


특별히 환대하지도 않지만,

굳이 밀어내지도 않는 거리감.

그 정도의 온도가 오히려 편안했다.




생활 전반에는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가끔은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어느 날 저녁 무렵,

딸이 머물고 있는 집에서

갑자기 전기가 나간 적이 있었다.


오피스에 연락했더니

담당자는 이미 퇴근했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연락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전혀 급해 보이지 않았다.

전기가 나갔다는 사실도

큰일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마음이 바빠진 쪽은 우리였다.


다행히 간단한 문제라

차단기를 올려 직접 해결했지만,

그때 문득 알 것 같았다.


이 나라에서는

지금 당장 해결되지 않는 일이

그리 큰 불편이 되지 않는다는 걸.




현지인들이 주로 가는 식당에 가면

대부분 여러 명이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밥을 먹고,

그 자리에서 차나 커피까지 마신다.


밥 따로, 커피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

머무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요즘 우리나라 물가를 떠올리면,

이곳에서의 밥 한 끼는

생각보다 부담이 적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여기서는 망설임 없이 오가는 것 같았다.




음식도 그랬다.

말레이 음식 같기도 하고,

중국 음식 같기도 하고,

인도 향신료가 섞인 듯한 메뉴들.


처음엔 정체성이 모호하게 느껴졌는데,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게 바로 이 나라의 정체성이구나.


여러 문화가 섞여 살아온 시간만큼

음식도 그렇게 섞여 있었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국적을 물었다.


자국민과 외국인의 입장료는 달랐다.

자국민에게는 아주 저렴했고,

외국인에게는 몇 배쯤 더 비쌌다.


처음엔 조금 낯설었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괜히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곱씹어 보니

이 차이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을 바라보는 감각의 차이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공공은 모두에게 동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면,

말레이시아에서는

공공을 대하는 기준이

조금 달라 보였다.


문화유산은

먼저 이 나라 사람들의 것이고,

외국인은 잠시 들른 손님에 가깝다.


그 기준이 불편하다기보다는

생각보다 솔직해서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 나라의 질서는

정확함이나 속도보다는

사람의 감정과 리듬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사람을 먼저 두는 기준은

일상의 아주 사소한 장면들 속에

이미 스며들여 있었다.


특히 ‘기다림’과 ‘속도’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 도시는

내가 알던 질서와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