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여행
새벽 5시, 남편의 알람 소리는 늘 예의가 없다.
포근한 이불속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해서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딛기까지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철석같이 약속했던 전날의 호기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비몽사몽간에 비겁한 협상을 시도한다.
“딱 5분만 더. 아니, 차라리 차 안 막히는 낮에 가면 안 될까?”
남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꾸 대신 익숙하게 이불을 들춰내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도심을 빠져나가는 타이밍을 놓치면
10분이면 될 길을 한 시간 넘게 도로 위에서 낭비해야 한다는 것.
그건 나에게도 견디기 힘든 소모다.
결국 나는 진다.
아니, 매번 지면서도 나중엔 꼭 이 말을 보태게 된다.
“당신 말 듣고 일찍 나오길 정말 잘했어.”
나의 이동이 늘 목적지를 향한 직선이었다면,
남편의 걸음은 늘 여유로운 곡선을 그린다.
목적지로 바로 가는 법 없이
“이왕 가는 길에 새로운 곳도 들러보자”며 길을 만든다.
이번엔 A코스, 다음번엔 B코스, 그런 식이다.
계획적인 나에게 남편의 방식은 때로 불필요한 지출 같았지만,
어느덧 나는 그가 설계한 ‘여백이 있는 이동’을 즐기게 되었다.
일이 목적이었던 길이 여행으로 바뀌는 순간은
대개 그 틈새에서 피어난다.
며칠 전, 부산에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도 그랬다.
가로등 불빛이 여전한 새벽에 출발해 고속도로에 오르니,
그제야 차창 밖 풍경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경부선을 빠져나와 상주–영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조수석에서 꾸벅거리다가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질 즈음,
〈삼국유사 휴게소〉 간판이 눈에 들어와 몹시 반가웠다.
그곳은 단순히 화장실만 들렀다 가기엔 참 아까운 곳이었다.
지나가는 길 위에 잠시 놓인, 짧은 역사 쉼표 같은 곳.
일연 스님의 설화가 덧입혀진 공간은
기계처럼 흐르던 고속도로의 시간을 잠시 느리게 만들어 주었다.
커피의 온기가 뻣뻣하던 어깨를 녹이자,
목적지에 닿아야 한다는 조급함도 함께 달아났다.
상주 나들목을 빠져나왔을 때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움츠렸던 산과 나무들도 햇살 한 줌에 기지개를 켜는 듯했지만,
바깥공기는 여전히 매서워 보였다.
우리는 자전거 박물관에 멈췄다.
굴러온 바퀴의 역사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도시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빠르게 지나치던 길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게 만드는 곳.
여행 중 잠깐 숨 고르듯 들르기 좋은 장소였다.
이어서 닿은 곳은 경천대.
절벽 아래 낙동강은 평온하기보다 차라리 서늘했다.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쩍’ 하며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묘한 긴장감을 주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우리는 도망치듯 인근의 한옥 북카페
‘경천서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의 모든 걸음은
이곳에 닿기 위한 준비였을지도 모른다.
고즈넉한 마당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낮게 흐르고,
소품샵의 물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얼굴로
각자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한옥은
한 칸, 한 칸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겨울이라 그중 한 칸만 따뜻하게 열려 있었다.
양쪽 벽에는 네모난 창이 나란히 걸려 있고,
그 안의 풍경은 액자처럼 조용히 담겨 있다.
유리 너머, 겨울빛을 머금은 소나무 사이로
낙동강이 말없이 흐른다.
춥고 적막한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먼저 가라앉았다.
카페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된 자리처럼.
그곳에서 마신 커피의 향과
말없이 머물던 그 시간은
아마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돌아보면, 이 여행은 어쩌면
경천서림에 잠시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동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하고 싶었던 건 장소가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와 마음이었고,
그러다 보니 내 글도 자연스레 여행의 얼굴을 하고 흘러왔다.
때로 목적지는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발견된다.
살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아 지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계획하지 않았던 틈에서 더 큰 위로를 만나기도 한다.
부산에서 돌아오는 길,
잠시 옆길로 새어 나갔던 그 하루처럼 말이다.
남편의 무계획은 언제나 내 계획을 배신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라는 좁은 세계를 부수는 가장 부드러운 망치였다.
그날의 상주는 내게 길 위의 쉼표 하나를 찍어주었다.
참 괜찮은,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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