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도의 크리스마스 풍경, 쿠알라룸푸르에서
“올해 크리스마스엔 하얀 눈이 올까요?”
뉴스에서 이런 말이 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는 걸 먼저 알아챈다.
괜히 마음이 들뜨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크리스마스는 늘 비슷한 장면이다.
왠지 크리스마스는 겨울이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풍경,
루돌프 사슴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오는 산타.
어쩌면 영화 속 이미지가
우리의 머릿속에 덧입혀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
언젠가 영화에서 반팔 산타를 본 적이 있다.
더운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으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쿠알라룸푸르에서,
30도를 웃도는 더위와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상상했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산타가
여기저기 나타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런 모습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이 도시의 크리스마스에는
내가 익숙하게 보아 오던 모습이 거의 없었다.
시내 번화가에서도 산타 복장을 한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구세군의 빨간 자선냄비도 볼 수 없었다.
아마 국교가 이슬람인 말레이시아의
문화적 다양성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대신 이 도시는 트리로 가득했다.
높이 솟은 대형 트리들이 곳곳에 서 있었고,
반짝이는 장식과 조명이 거리를 화려하게 물들였다.
공기 속에는 캐럴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따라 경쾌하게 움직였다
쇼핑몰들은 11월부터
장식 준비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늘 더운 나라에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는지,
연말이 가까운지 알아채기 힘들 테니까.
그래서인지 트리 하나하나,
장식 하나하나가 눈부시고 화려했다.
⸻
랜드마크인 트윈타워 근처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열렸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들의 물결로 거리가 출렁였다.
사람들 사이에 묻혀 잠시만 손을 놓쳐도
서로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남편과 손을 꼭 맞잡고 있어야 했다.
붐비는 거리 속, 사람들의 시선은
곳곳에서 펼쳐지는 크리스마스 장면에 쏠려 있었다.
그중 하나가
하얀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연출이었다.
폼(foam)으로 만든 인공눈이었지만,
영화 속 장면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에
사람들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눈송이가 흩날리고,
오색찬란한 조명이 거리 위로 춤을 추자
사람들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말레이어, 중국어, 인도어,
어설픈 영어까지 섞인 탄성은
내 귀에는 아기의 옹알이처럼 뭉개져 들렸다.
⸻
일 년 내내 더운 나라 사람들에게 하얀 눈은
신기한 풍경이겠지만,
솔직히 우리에게는
눈을 보러 나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이런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다른 문화를 체험하는 일은 늘 가슴이 뛴다.
한국에 있었다면 나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을까.
산타를 기다리던 아이들은 이미 성인이 되어
창가에 양말을 걸어둘 일도 없고,
아마도 “오늘이 크리스마스잖아” 하면서
치킨에 맥주라도 한 잔 하지 않았을까.
⸻
그렇게 나는 남편과 함께
KL에서의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더웠고, 피곤했고, 내 리듬과는 달랐지만,
낯선 도시에서 맞은 이 특별한 하루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