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태국 끄라비에서 — 깜짝 이벤트

by 앨리스킴


딸이 휴가를 내 3박 4일 일정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우리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몰랐다.


“우리 끄라비로 가는 거야.”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말레이시아 어딘가 일 거라 짐작하며

검색창에 ‘끄라비’를 쳤다.


화면 가득 바다 풍경이 펼쳐졌다.

석회암 절벽과 에메랄드빛 바다,

해변가에 줄지어 떠 있는 긴 꼬리배 사진들.




우리가 가는 곳은 태국의 휴양지였다.

그제야 딸아이의 깜짝 이벤트였다는 걸 알았다.


“엄마 아빠 회갑, 결혼기념일, 생일...

다 합쳐서 이걸로 퉁 치는 거야.”


딸의 호기로운 선언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퉁 치기엔 너무 고맙고 기특한 딸아이의 진심에

우리 마음은 벌써 비행기보다 높이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예정에 없던 곳에서,

뜻밖의 환대를 받으며 여행을 시작했다.





끄라비 아오낭 비치에서의 문화 충격


끄라비는 태국 남쪽 연안에 있는 휴양지다.

한국에서는 직항이 없어 경유를 해야 하지만,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비행기로 한 시간 반이면 닿는 곳.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제주도쯤 되는 느낌이었다.


끄라비 공항에서 그랩을 타고

40분쯤 달려 아오낭 해변에 도착했다.


야자수 나무 사이로 흐르는 바람에서

짭짤한 바다 냄새가 났다.

사람들 발걸음은 모두 해변 쪽을 향하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우리도 곧장 바다 쪽으로 나섰다.

거리의 사람들을 본 순간,

우리 셋은 동시에 헉— 숨을 들이켰다.


사람들의 차림이 거의 비키니였다.

아니, ‘거의 벗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남편은

“도대체 눈을 어디다 둬야 하냐”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우리가

오히려 계절을 잘못 읽은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옷을 더 입어서 민망해지는 건 처음이네.”


그 말이 웃겨서

우리는 서로를 보며 그냥 웃었다.



끄라비는 11월부터 2월까지가 성수기라고 한다.

관광객 대부분이 유럽인이었고,

이곳이 동남아라는 사실이 잠시 잊힐 만큼

동양인은 거의 우리 셋뿐인 듯 보였다.



호텔 조식당에서도

비키니 차림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오갔다.

정작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우리의 시선은 괜히 딴청을 부렸다.


문화라는 건,

책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겪는 것이 이렇게 다르다는 걸

그때 실감했다.




찰나의 노을, 그리고 남은 것


첫날,

아오낭 해변의 일몰을 놓치면

끄라비 여행의 반은 놓치는 거라는 말을 듣고

시간을 맞춰 나갔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탓일까.

낯설지 않은 평범한 노을에 약간 김이 빠졌다.




그런데 다음 날,

하늘은 유난히 맑았고, 구름마저 예뻤다.

오늘의 노을은 어제와는 분명 다를 것 같아

마음이 먼저 설렜다.


섬 투어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잠깐만 쉬었다 나가자고 했던 것이

그만 깊이 잠들어 버렸다.


“해 떨어질 시간이야, 빨리 가자.”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에 허겁지겁 나섰지만

한 발 늦은 기분이었다.


바다 위 하늘은 서서히 바뀌어,

분홍빛과 주황빛이 잠깐 겹쳤다가 이내 번지듯 퍼졌다.

마치 다른 세계의 빛 같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누군가 불을 끈 것처럼 빛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늘은 잿빛으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발끝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만큼이라도 본 게 어디야. 이것도 행운이지.”


서로 그렇게 말하며 애써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해는 검은 구름띠 아래로 완전히 숨어버렸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잠시 후, 북소리와 함께

어둑해진 해변에서 시작된 불놀이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불기둥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더니

빙글빙글 돌며 원을 만들고,

별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놓친 노을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순간의 축제 같은 분위기는

아쉬운 마음을 충분히 채워주었다.



마지막 날이었다.

어제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일찍 해변에 닿았다.


무심한 얼굴로,

하늘은 평범하게 서 있었다.


같은 장소지만,

같은 노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종종 “다음에-”라며

많은 것들을 미뤄둔다.


하지만 그 ‘다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그날 해변에서 경험했다.



그 이후로,

해질 무렵이면 나는

발걸음을 조금 더 서두르게 된다.

‘바로 지금’이라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