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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미 Nov 16. 2021

65년생의 인생 첫 연남동

서울에 살았지만, 연남동은 처음이라.

모처럼 딸아이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홍대역 근처 '블랑'이라는 베이커리 카페에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으란다.

전철을 타고 혼자 멀리 나가 본 지 얼마만인가. 

어디서 갈아타야 하는지 사전 시뮬레이션을 했음에도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

이건 나이 탓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음의 문제라며 애써 태연한 척 마음을 다잡아 본다.


‘홍대? 연남동? 그 젊은 청춘들의 핫 플레이스라는 곳 말이지?’

언제부터 딸아이한테 졸라댔었다. ‘나도 연남동 카페거리 가 보고 싶다.’

혼자라도 가 볼까. 남편한테 가자고 할까.

좀 더 젊었던 삼, 사십 대 때엔 그래도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카페와 맛집을 탐색하고 다녔었는데..

어느새 아! 옛날이여~가 돼 버렸다.


화려한 파티가 열리는 청춘호에 초대받지 못한 승객처럼 어색한 몸짓으로 여기저기 기웃거릴 50대의 내 모습이 상상이 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만한 일에 무슨 용기 씩이나 필요해?~”

맞다. 하지만 50대 후반으로 가면서 요즘 세상 속으로의 편입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고,

자신감도 떨어져 두려운 감 마저 생기니 용기가 필요할 수밖에.


일하고 있는 딸아이 한테서 톡이 왔다.

혹, 일이 생겨 약속 취소 통보일까 불안했는데,

카카오 지하철 맵을 캡처한 동선과 간판 이름이 'BLANC' 불어로 되어 있으니 잘 찾으라는 내용이다.

“도착하면 커피 시키고 인증샷 올려줘~”

이젠 아들 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엄마가 되었나 보다.


신경을 바짝 쓴 덕분에 무사히? 약속 장소에 안착. 딸에게 보고?를 했다.

‘미리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블랑>이라는 간판만 열심히 찾을 뻔했다~’




2층 커다란 창쪽에 자리를 잡았고, 커피의 진한 향기가 긴장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거리의 나무들이 후드득 늦가을을 떨구어 내고 겨울 채비를 한다.

-잎을 다 떨구어 내고 비워야만 다시 채우는 나무들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인생을 배웁니다-

… 어디서 읽었더라?  문장이 좋아 노트에 적어 뒀었는데…


거리의 풍경은 젊은 활기가 넘치고 저마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다.

이래서 젊은 사람들 주변에라도 얼쩡거려야 하나?


“엄마가 진짜 좋아할 만한 밥집 소개 해 줄게~”

거리로 나오니 한겨울 못지않은 찬바람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딸아이와 팔짱을 끼고 연남동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sns에 맛집이라고 소개된 곳들이 가끔 눈에 띄어 ‘내가 여길 와 봤었나?’ 착각이 들 정도로 익숙해 보이는 곳도 더러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한참 다니다가 딸아이가 데려간 곳은, 밥집 이라기보다는 레스토랑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만한 분위기의 일식요리를 하는 작은 식당이었다.


“아이구! 오랜만에 오셨네요.”.  

요리사이기보다는 아티스트 같은 인상을 더 풍기는 사장님은 딸아이를 이미 아는 듯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하긴, 요리도 창작이니 아티스트 인가?’

군더더기 없이 모던한 실내 인테리어, 소품 하나하나까지도 그릇도, 수저도 감각적이다.

식당 이름도 <He said yes> 참 연남동스럽다!

아내에게 프러포즈를 받고 yes!라고 해 가게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아내에 대한 사랑이 보이는 것 같다.



주문한 요리와 함께 화이트 와인 한 잔이 딸려 나왔다.

“저희 집 단골이신데 어머니랑 오셨기에 서비스로 드리는 겁니다..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보이며 뒤돌아 선다.

'와우~ 여기가 연남동인데? 감동^^’ 집 근처 변두리 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딸아이 덕분에 시원한 화이트 와인이 따뜻하게 목으로 넘어간다.

내 돈 내고 먹었는데 합리적인 가격에 고급진 대접을 받은 기분이라 뿌듯하기까지 하다.

2층으로 올라갈 때엔 ‘좀 외진 곳인데 식당 운영이 될까?’ 싶었지만, 나올 때 보니 여남은 개의 테이블이 거의 차서 다행스럽다.

공연한 오지랖을 뒤로한 채 다시 연남동 거리 탐험을 계속했다.

‘음 ~~ 밤공기가 참 좋다!’ 낯선 나라의 도시를 여행하고 있는 이 기분은 … 그래, 설레는 긴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다음 코스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샾으로 데려갔다.

앙증맞은 캐릭터 그림엽서들. 액자. 작은 메모지. 스티커…

도저히 사지 않고는 그냥 지나칠 베짱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귀엽고 예쁜 물건들이다.

딸 친구들은 오면 꼭 한 두 개씩은 산다고. 그래서 예쁜 쓰레기라는 말이 생겼단다.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예뻐서 샀는데 결국은 버려지게 되는-

딸아이의 합리적인 만류에 눈에만 담아왔다. ‘이럴 땐 정말 누가 엄마인지 원…’


‘엄마의 <인생 카페>가 될 거야. 분명.’

이번엔 또 어떤 곳이길래…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따라나섰다.

딸아이는 마치 여행 가이드 라도 된 듯이 성큼성큼 모퉁이를 능숙하게 돌고 돌아 일반 가정집처럼 생긴 빌라 앞에 섰다.

어른들끼리 왔더라면 도저히 찾지 못할 그런 장소에 카페라니, 그것도 인생 카페로 정해도 될 만큼 매력 있는 곳이라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에 100% 예약제로 운영한다고 적혀있다.

‘엄마랑 오려고 미리 예약 해 뒀지~’

??? 카페인데 예약제라니? 의아하고 생소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아! 상큼한 허브향이 주인인 듯 반겨준다.



초야에 묻혀 지내는 어느 예술가의 집에 우리만 초대된 듯한 아늑함과 편안함과 특별함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가정집이었을 구조를 그대로 활용한 공간의 분할, 공간마다 각기 다른 분위기로 연출한 주인의 센스가 돋보인다.

집 같은 카페? 카페 같은 집? 그래서 더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곳곳에 걸려있는 세련된 액자들, 무심한 듯 감각적으로  놓인 책들과 소품들…

화장실의  분위기마저도 주인의 감성을 닮아있는 듯하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스쳐버릴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딸아이와 나는 사진 속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집이었으면…’하는 바람은 여기 온 젊은 친구들 대부분의 희망사항이었을 거란 생각을 잠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 나도 내 집 생기면 이런 공간으로 꾸밀 거야.” 

나도 공감!


*hyggelig hus* ‘휘겔리 후스’는 덴마크어로 ‘아늑한 집’이란 뜻이란다.

이름도 감성적으로 참 잘 지었다.

처음 지향했던 취지가 훼손되는 것 같아 프라이빗 하게 예약제로 돌렸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이름답게 <아늑한 공간에서 내 집처럼 편안히 쉬어 가라>는 주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든다.

미술을 전공했다는 이곳 주인의 감각도 돋보이지만, 차근차근 메뉴 설명과 함께

‘책꽂이에 진열된 책들은 중고이니 부담 없이 보세요~’

친절한 말투에서 느껴지는 상냥함에 엄마들 특유의 본색이 드러난다. ‘우리 아들도 저래야 할 텐데… ‘


“엄마, 아빠랑 두 분이서 같이 와~”

"그래야겠네.~"

혼자 있을 남편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제야.~

그런데 어딜 가나 대부분 젊은 청춘들이다.

‘청춘들만 오세요~’라고 씌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쭈뼛거려질 것 같다고 했더니

딸이 기꺼이 다음번에도 봉사를 하겠단다 ㅎㅎ 딸 없었음 어쩔 뻔!

이런 말이 있지. <이 세상의 엄마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딸이 있는 엄마와 딸이 없는 엄마로.> 

명언이다. 적어도 나에겐.


오늘의 마지막 코스!

"저긴 뭐하는 곳이야? <인생 네 컷>???" 젊은 청춘들이 길게 줄을 섰다.

딴 곳에도 있으니 그쪽으로 가잔다.

아하! 스티커 사진이구나. 요샛말로 인생네컷 이라고 한단다. 

여러 컷 찍고 마음에 드는 네 컷만 선택한다고 해서.

딸아이는 내가 미처 탐색할 틈도 안 주고 후다닥 기계 조작을 하더니 앞에 있는 거울 보고 서 보란다.

“15초 여유가 있으니 표정관리 잘하고 정면 말고 카메라 렌즈를 봐야지 안 그러면 사시처럼 나와~.”

카메라 감독이라도 된 냥 서두르는 본새가 한두 번 해 본 것 같지가 않은 손놀림이다.

그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배울 틈도 없었다.

‘천천히 해봐 봐~ 아빠랑 둘이 오면 해보게.’ㅋㅋㅋ 딸이 웃는다.

어떻게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데 이렇게 다를까. 이 작은 사소한 것들에 겁부터 나니 말이다.

나도 <인생 네 컷>을 건졌다. 딸 덕분에.




연남동 나들이를 마치고 역으로 가는 길에 연트럴 파크를 지나왔다. 

연트럴 파크는 초면이라…

“왜 연트럴 파크 인지 알아?” 딸아이가 묻는다.

‘당연히 모르지. 센트럴파크는 알아도….’

“뉴욕 센트럴파크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는 도심 속 녹색공간이라 그렇게 부른대.”

"좋다! 여기. 단풍도 이쁘고, 거리가 온통 젊어서 좋고 예쁜 카페도 많고 맛집도 많고…"


그렇게 늦은 저녁까지 연트럴 파크에서 아마도 유일했을 65년생으로 함께했다.

딸아이 덕분에 연남동 에서의 그 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 순간 떠오른 구호마저도 옛날 사람 같지만 읊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연남동의 중심에서 행복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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