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세 할머니의 숨겨진 재능.
"앞으로 몇 번이나 보겠나.."
몇 년 전부터 할머니는 헤어지기 전 다음에 오겠다는 말에 이런 대답을 하셨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엔 할머니의 나이가 어느새 9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 년에 두 번씩 명절마다 당연하게 찾아뵀던 때가 있었는데, 회사를 다니다 보니 그 당연한 일을 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렇게 찾아뵙지 못하는 기간이 갈수록 점점 길어졌고, 그걸 모르지 않으실 할머니에게 헤어짐은 나날이 더 아쉬우셨을게 분명했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물리적 거리 때문에 직접 자주 찾아뵐 순 없어도 때때로 피자나 짜장면 같은 것을 배달시켜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내 친구가 찾아와 피자를 주고 가더라고, 고마운 친구라고 말씀하곤 하셨다.
"서울에서 손녀가 주문하신 거예요!" 했던 배달원을 내 친구라고 오해하신 것이다.
21세기에 스마트폰 없이 살고 계시는 할머니에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클릭 몇 번이면 음식 배달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드셨을 것이다.
유달리 꽃을 좋아하시는 할머니께 꽃도 몇 번 배달해드렸는데, 마지막으로 배달드린 꽃이 상자채로 며칠 동안 문 앞에 방치되어 다 시들어있어 그 이후로 꽃을 보내는 일도 그만두었다.
집 문 앞에 말없이 놓고 가도 아무도 훔쳐가지 않는 우리나라 택배 시스템이 좋다고 느꼈는데 며칠이나 집 밖을 나가실 일이 없는 분들은 그 시스템 속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각설하고, 그 꽃 사건 이후 할머니께 꽃 대신 어떤 것을 보내드리면 좋을까 하던 찰나에 아빠가 컬러링북이 치매에 좋다는 기사를 봤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럼 할머니 꽃 좋아하시니까 꽃 그려진 컬러링북 드려볼까? 너무 어렵지 않을까?"
"그래 하다가 어려우면 안 하시겠지."
대수롭지 않게 그러니까 큰 기대 없이 몇 장만 색칠하셔도 괜찮겠다는 마음으로 책과 색연필을 사드렸다.
"이게 뭐꼬..?" 하고 되묻던 할머니에게
"그냥 색칠하는 책이에요 할머니! 그냥 아무거나 칠하시면 돼요! 시간 나실 때, 심심하실 때 색칠하세요." 하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을 잊은 채, 내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어느 날 가족 단톡방에 사진이 몇 장 올라왔다.
"할머니가 하신 거야. 이모들이 그러는데 하루에 12시간씩 하신대! 손에 굳은살도 생기셨대!"
라는 엄마의 메시지와 함께.
"뭐라고..?"
할머니의 완성품을 사진으로 확인하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컬러링북을 해본 사람을 알겠지만 저걸 저렇게 색칠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집중하다 보면 눈도 아프고 손도 저리고 무엇보다 너무 지겹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근데 할머니가, 색연필을 강하게 쥐고 계시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할머니가 저만큼을 하셨다고?
색 조합은 또 뭐야. 저걸 할머니가..? 내가 드린 24색 색연필로 하신 건가?'
정말 너무너무 놀라웠다.
우선 나를 놀라게 한 할머니의 컬러링 북 사진을 먼저 공개해본다.
이렇게 표지부터 색칠하시는 건 줄 알고 표지의 글자까지 전부 칠해두셨다.
저 글자조차 단색이 아닌 무려 각각 다른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그냥 컬러링 북이 한 순간에 너무너무 정성스러운 책으로 완성되었다.
하나씩 캡처해 올리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 6장씩 모아보았다.
초록색 색연필이 부족하시다고, 초록색만 구입할 수는 없냐고 연락하셨던 이유를 할머니의 책을 보니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받으셨던 당시 할머니의 연세는 89세였다.
89세에 하루 12시간을 몰입해도 재미있고,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서 다시 몸을 일으키게 되는 일을 만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이 컬러링북 덕분에 89세에 내일이 기다지는 나날을 살고 계신다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반가웠다.
아들 딸은 물론이고 손주들, 증손주들까지 할머니의 그림에 관심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엄마, 장모님, 시어머니 혹은 할머니로만 알아왔던 우리 할머니에게 이런 재능이 있을 줄, 수많은 가족 중 어느 한 명도 상상하지 못했다.
진즉 알았더라면 미술을 시켜드릴걸. 지나버린 시간이 못내 아쉬울 정도였다.
우리는 컬러링북 사이즈에 맞는 액자를 대량 구매해, 각자 마음에 드는 그림 한 개씩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전국 각지에 할머니와 혈연관계로 얽힌 30여 개가 넘는 가구에 할머니의 그림이, 정확히는 할머니가 완성하신 그림이 걸려있게 되었다.
작년 7월, 컬러링북을 접하신 지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을 때 할머니는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언제나처럼 컬러링을 하시다가 색연필을 손에 쥔 채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컬러링북이 아니었다면 좀 더 일찍 발견되지 않았을까?'
'당연히 그림을 그리시는 줄 알고 있던 시간으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할머니는 색연필을 잡으셨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이건 단순히 책을 색칠하는 일이 아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한 개인으로써 가져본 취미였다.
생의 마지막 몰입이었고, 태어나 처음으로 내보이신 재능이었다.
그 많은 가족들과 지인들의 주목, 할머니의 그림에 대한 관심, 그리고 진심 어린 감탄과 칭찬.
이런 것들이 나는 할머니를 더 살게 했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제는 색연필을 잡으실 수 조차 없지만 코로나가 끝나고 병원에 방문해 할머니를 찾아뵐 수 있게 된다면 꼭 가서 할머니께 당신의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다.
할머니가 하신 거라고.
검정색 선들에 불과했던 집, 새, 물고기, 나무, 꽃 전부 할머니 손에서 생명을 얻은 것들이라고.
그리고 꼭 할머니 손에 다시 색연필을 쥐어드리고 싶다.
더 그려달라고. 남은 책들도 전부 얼른 일어나셔서 색칠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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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할머니의 선물을 고민하고 있다면 컬러링북을 추천한다.
생각보다도 훨씬 푹 빠지실 수도 있다는 유의사항을 알아두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