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 거 가서 살겠나? 서울 깍쟁이들 있는데 가서 경상도 사람이 기죽을낀데. 선후배 한 사람도 없는데 가서 우얄라꼬”
교감 선생님의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을 안고 경기도로 왔다.
객지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들 한다. 지나가는 간판에서 고향 근처 동네 이름만 나와도 반가웠다. 그래서 식당 이름에 유난히 지명이 많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나뿐이랴 한국 사람들 정서가 모두 그러하니 고향연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고향이 아닌 곳에서 직장을 다니며 경북의 어느 작은 시골의 여고 동문을 만나거나 같은 대학 동문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경기도에서 근무한 26년 동안 여고 동문 2명, 대학 동문 5명이 다이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좁다며 반가워하고 했었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다.
낯선 학교, 처음 만난 교무실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선생님이 반가워
“혹시 어디 교대세요?”
“대구교대인데요”
“어머 반가워요.”
“요즘 그런 거로 편가르기하면 안되요.”
웃으면서 말하는 그 후배의 말이 맞지만 고향 까마귀만큼도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서울 깍쟁이를 만나기도 전에 고향 후배한테서 뭔가 모를 씁쓸함을 당했다.
같은 학교에서 동학년으로 근무하던 후배 선생님이 나와 같이 경기도로 왔다.
후배는 수원으로 나는 부천으로 각각 발령이 났다. 서로 연락하고 지내자 약속을 했지만 새로운 곳,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지내며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돌박이 아기를 데리고 수원에서 부천 우리 집까지 놀러와서 얼굴 한 번 본 게 다였다.
5살, 7살 남매를 키우던 내가 더 부지런했으면 그 만남이 더 지속되었을 텐데 나는 난생처음 시작한 타향살이에서 억지로 살아내느라 그럴 겨를이 없었다. 후배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하면서 돌박이 아이를 키우느라 나보다 더 시간이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으로 잊혀진 채 살았다.
4년 전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그 후배가 궁금해졌다.
마침 그때 내가 수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후배였으니 승진을 했을 것이라 예상하여 교육청 직원검색에서 이름을 넣었더니 떡하니 장학사가 되어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바로 옆 기관이었다.
세상은 좁다.
내가 찾는 후배도 어느새 서울 깍쟁이가 되어 편가르기 운운하던 후배처럼 나를 대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궁금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서 전화를 하였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위치에 후배가 근무하고 있었다니, 다행히 후배는 나를 반가워하여 우리의 마음이 좁아지지 않았음에 기뻤다.
가끔 만나 밥을 먹고 후배는 교감이 되고 나는 명퇴를 하였다.
명퇴를 한 후 브런치를 시작하였다. 글을 쓰고 다른 사람의 글도 읽으며 지내던 중 내가 아는 사람의 냄새가 나는 글을 발견하였다. 작가 소개를 보고 작품을 찾아 읽어보니 그 후배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카톡으로 인사하며 혹시? 하니 역시였다.
나도 브런치를 한다며 작가명을 말하니 후배는 내 글의 제목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 자기도 끌렸단다.
랜선은 넓다.
어제의 일이다.
난생처음 시작한 타향살이는 기죽임은 없었지만 서글펐다. 달랑 우리 네 식구뿐이다. 아이가 아파도 맡길 곳은 커녕 상의할 곳도 없었고 학교를 가도 선후배가 없으니 다른 교대들 동문 모임 등을 구경하는 것으로 그쳤다.
다행히 교사집단은 별나게 모난 구석이 없으니 두루두루 잘 지내게 되고 몇몇은 특히 친하게 지내게 되는 등 그렇게 살아왔다. 그중에서 서로의 집을 오가며 친하게 지내는 선배가 있었다. 고향도 학교도 다른 비경기도 동문이다. 우리 아들이 선배의 집에 가서 얼마나 열심히 짬뽕을 먹었는지 아직도 웃으며 그 이야기를 한다.
아들이 감기로 아플 때 먹이라며 보양식을 나눠주기도 하고 생각이나 성격이 비슷하여 말이 통하는 선배이다. 부천과 목동으로 사는 곳도 같이 옮겨가고 같은 학교에서 두 번이나 근무하는 등 인연을 이어 오며 자연스럽게 언니 동생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내가 수원으로 오면서 연락이 뜸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두 번째 객지에서 사느라, 같은 경기도라도 교직 문화가 다른 수원의 학교에 적응하느라 또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가끔씩 그 언니가 전화를 하여 끊이지 않고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명퇴를 하였다. 명퇴를 해도 언니는 남편이 있는 군산으로 가서 지내는 중이라 얼굴은 보지 못하고 조금 더 시간이 생겨 자주 전화를 하게 되었다.
카톡으로 인사가 왔다. 작가님이 되셨네~ 하며. 인터넷에 떠다니는 글을 보다 아무래도 나 같아서 글을 찾아 읽어보니 내가 맞더란다. 익명의 작가명 뒤에 숨었었는데....... 브런치를 하지 않는데도 내가 보였다니.
랜선은 끝없이 넓다.
오늘의 일이다.
이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세상이 좁으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 이제 랜선으로 넓혀진 세상에선 더욱 조심하며 잘 살아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의도치 않아도 몇 번의 클릭만으로 알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글에는 글의 쓴 사람의 냄새가 있다.
살아온 흔적이 담겨있다.
물론 픽션인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필력이 부족한 나는 나의 경험이 주로 글감이 되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기 위한 위선적인 삶은 안되지만 적어도 글을 써서 욕먹지 않을 만큼의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