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만에 밝히는 두 가지 비밀
요즘은 아이들이 아무리 예쁘고 귀여워도 쓰다듬지도 못하는 세상이다. 잘못하면 성희롱이 되고 아이의 의사에 반한 스킨십은 자칫하면 성추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옛날에는 쉬는 시간엔 교사 책상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와 서로 선생님과 이야기하려 하고 선생님 손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표현이 서툰 어떤 아이는 안마랍시고 다짜고짜로 내 어깨를 마구 주무르기도 하고 그럼 다른 아이들은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나를 이리저리 잡아당기면 나는 그냥 아이들에게 몸을 맡겨버리고 아이들의 웃는 모습에 나도 좋았다. 그렇게 나와 아이들은 편하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환경정리라도 하는 날에는 학급 미화부 친구들과 퇴근 시간 가까이 교실을 꾸미고 아이들과 짜장면을 먹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최고의 음식이었지만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교사인 나도 그때의 짜장면은 역시 최고였다. 더군다나 선생님이 되어 제자들과 함께 먹는 짜장면은 왠지 더 맛있었고 뿌듯했다.
집으로 가는 101번 버스 정류장은 아이들이 사는 아파트를 지나 한참을 걸어서야 있어서 퇴근 시간엔 우리 반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우리 반 아이들이 10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너네 어디 가려고 여기 모였니? 곧 있으면 저녁시간인데”
“히히히 크크크 선샘 집에 따라 갈려고요. 엄마한테 허락받았어요”
아뿔싸, 큰일이다. 아이들은 선생님은 똥도 안 누는 줄 알고 있는데 당시 자취를 하고 있던 내 방은 아침에 온통 어질러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 늦어서 안 되고 토요일에 가서 놀자”
“안돼예, 지금 갈 거라에”
나는 결국 지고 말았다. 그리고 새내기 교사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버스 안에서 선생질을 하고 말았다.
“얘들아, 다른 승객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해야지. 손잡이 꼭 붙잡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차례차례 질서 지키며 내리세요”
그리고 어둡기 전에 다시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 집까지 모셔 드리고 다시 퇴근하였다.
다행히 아이들의 눈엔 어질러놓은 방 상태는 보이지 않았는지 아님 모르는 척해주었는지 학교에 선생님 방이 더러웠다는 소문은 나지 않았다.
그 후로 선생님 집에 가지 못했다는 나머지 50여 명(그때는 한 반에 60명이 기본이었음)은 호시탐탐 101번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만날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나는 안전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고 맘 편히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선샘예, 어디 갔다 이제 오십니까”
아이고 깜짝이야, 분명히 아침에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출근을 했는데 자취방의 부엌문이 열려있고 방엔 훤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자취방의 허술한 시건장치를 과감히 풀고 아이들이 내 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시간이 9시가 훨씬 넘은 밤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히히, 우리가 버스 타고 왔어요. 선샘 애인이에요?”
내 옆에는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 친구가 나를 데려다주러 함께 왔었던 것이다.
“아~ 아니, 선생님 오빠야 오빠”
“에이 오빠라고예? 지난 번에 왔을 때 오빠 없었잖아요?"
"그 그때는 오빠가 늦게 퇴근해서 없었지 "
"근데 너네 너무 늦었는데 아직까지 여기 있음 어떡해? 선생님이 안 계시면 그냥 갔어야지. 아니 첨부터 오지 말았어야지. 위험하다고 안된다고 했잖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아이들을 단호히 꾸중하고 보니 9시 넘도록 저녁을 먹지 않은 아이들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다 알아서 먹었어예. 찬장에 있던 김치하고 빨간 오징어무침 맛있어서 우리가 다 먹었어요. 전기밥솥의 밥도 다 먹었어예. 선샘 밥도 안 남겼는데 우짜지요?
“오징어무침??? 그래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어서 가자. 다음부턴 절대 오면 안 돼”
그날 나는 또 늦은 밤 버스 안에서 선생질을 하며 아이들을 집 앞까지 모셔 드리고 아주 늦은 퇴근을 하였다.
그날 밤 나는 많은 걱정에 잠이 들지 못했다.
‘아이들이 오빠라고 한 것을 믿지 않고 선생님 애인 있다고 소문내면 어쩌지?’
‘사실 그 빨간 오징어무침은 고추장 양념에 돼지고기 재워놓은 것인데 생고기 먹어서 아이들 배탈 나면 어쩌지?’
다음 날 아침, 아이들은 아무 탈 없이 등교했고 선생님 오빠에 관한 소문도 나지 않았다.
요즘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사회 분위기도 그렇고 아이들과 학부모님들도 모두 예민하여 교사의 언행 또한 조심스러운 시대에서 교사와 아동의 학교 밖 관계 맺기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 되어버렸다. 담임을 하게 되면 학부모의 민원이 없고 학교폭력 없이 무사히 1년을 지난 것에 감사(?)해야 하는 요즘에는 정말 선생 하기 힘들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행히 명퇴하여 일선에서 물러나 그런 부담감이 없어서인지 나는 아직도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을 하고 학교에 가는 꿈을 꾼다.
지금은 40대 중반이 되어 있을 그때의 아이들을 만난다면 이제 정말 맛있는 오징어무침을 해줄 수 있는데 ~~
35년 만에 오징어인 듯 오징어 아닌 빨간 고기와 오빠인 듯 오빠 아닌 남편의 정체를 나의 첫사랑이었던 그때의 아이들에게 고백하며 라떼는 말이야 하며 추억 이야기 꽃을 피우고 싶다.
“애들아, 어디에 있니? 우리 101번 버스 정류장에서 한 번 뭉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