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조차 아득하다.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이었을 듯싶다. 새해 첫날이면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정성스레 새해 다짐을 적곤 했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서른 중반쯤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해가 바뀌어도 새해 다짐을 적는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나도 모른 사이, 나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다. 다짐을 멈춘 게 아니라 나를 기대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꽤 오랫동안 이어왔던 습관인데 말이다. 그렇게 적어놓고 지키지 못한 결심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작년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매년 적었다.
어릴 적에는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키가 쑥쑥 자라 절로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신체의 성장이 멈춘 성인이 되고 나니,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매일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아 불안했다. 다짐의 내용은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운동하기, 영어 공부하기, 자격증 따기 같은 것들. 그 목록은 매년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언제부터 스스로 성장하기를 멈췄던 걸까. 새해 다짐을 적지 않는 것을 왜 그토록 당연하게 여겼을까. 이제는 그저 늙어갈 일만 남았다는 체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실패만 하는 내가 보기 싫어서였을까?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성장하고 싶다.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고,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오늘, 정말 오랜만에 종이와 펜을 꺼내 앞에 앉았다. 아이도 불러 옆에 앉혔다. 혼자서라면 아마 또 미뤘을 일이다. 둘이 귤을 까먹으며 올해 어떤 것들이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는 한참을 고민하다 첫 번째 다짐을 적었다.
‘1. 스타크래프트에서 모든 종족 마스터하기’
내심 굳은 결의를 띠고 앙 다문 아이의 입술이 귀여웠다. 나의 다짐도 아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창한 목표도 없고, 꼭 이뤄내야 한다는 부담도 없지만, 나만의 작은 새해 다짐들을 적어 내려갔다. 과연 얼마나 지켜질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적고 나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내 안 깊은 곳엔 여전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나 보다.
결국 새해 다짐을 적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표를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가장 정중한 약속일지도 모른다. 성장이란 눈에 보이는 성과나 숫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올해의 다짐들이 얼마나 지켜질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금 나를 성장시키려는 마음만으로, 그 설렘만으로도 나의 새해는 충분히, 이미 성장하기 시작했으니까.